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 국격(國格)이 있다고 한다.
힘만 있고 사람다운 인품이 없으면 뭇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국력만 세고 국격이 없다면 국제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
나라다운 체모를 갖추고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행세하려면 국력과 국격을 함께 배양해야한다는 얘기가 된다.
연초부터 이 국격이 온통 화두가 되고 있다. 대통령은 세계가 우리를 선진일류국가로 보기 시작했다며 해외지원도 우리의 국격에 맞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가브랜드위원회는 국격을 높여 수출단가 등 부가가치를 키워야 한다며 G20정상회의를 개최하는 금년이 대외신인도 및 국가브랜드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거듭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류언론들은 저마다 '대한민국 찬가(讚歌)'로 화답하며 싸움질 국회와 불법시위, 불법파업을 국격 향상의 걸림돌로 부각시키기에 안간힘이다. '국격 제고(提高)'가 국가적 어젠다로 굳게 자리 잡은 느낌이다.
나라의 품격이 무슨 수출목표 달성하듯 전략적 노력으로 어떤 목표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국격 높이기를 국가 슬로건으로 내건 국가가 지구상에 또 있는가.
세계 최초로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바뀌었다고, G20정상회의 개최국이 되었다고, 원전을 수출하는 나라가 됐다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가운데 경제회복속도가 가장 빠르다고 대한민국의 국격이 따라서 올라가는 것일까.
국격과 그 나라의 인지도(認知度)는 엄연히 구분되어야한다. 집중적인 국가홍보나 몇몇 글로벌기업의 약진, 또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주요 국제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국제적인 스포츠스타나 예술인 등을 통해 그 나라의 인지도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그 나라의 품위와 격조가 따라서 높아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격은 한 나라에 대한 신뢰와 믿음 인상 등 이미지의 총체요 그 나라가 지닌 매력이다. 물량적이고 가시적이기보다는 정신적이고 내재된 가치가 소중하다.
국격은 국가홍보나 국민들에 대한 무슨 캠페인성 연출로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념비적 빌딩이나 공원을 꾸미고, 매머드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캠페인에 인파를 동원하는 방식으로는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지 않는다.
'자가발전'이 아니고,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한국적 가치가 바깥사람들에게 찡한 감동을 줄 때 대한민국의 품격은 올라간다.큰 국제행사가 있을 때마다 청결 질서 친절을 강조하지만 행사기간 중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시적 '변신'만으로 국격은 올라가지 않는다.
운전대만 잡으면 양보를 모르는 거리의 자동차문화,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차창 밖으로 침을 내뱉는 몰염치, 내릴 사람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밀고 들어오는 지하철 승차문화, 서로 눈에 잘 뜨이게 하려고 덕지덕지 간판들을 내걸어 볼썽사납고 흉측해진 한국 도시들의 경관에서 품격이 배어날 리 없다.
우리의 자랑 수도 서울은 미국의 유수 여행정보 웹사이트 설문조사에서 '세 번째 최악의 도시'로 꼽혔다. 옛 소련식 병영을 연상케 하는 획일적 모양의 아파트들, 어지럽게 이리저리 얽힌 콘크리트 구조물과 도로들은 우리 형편에서는 어쩔 수 없다 치자.
'600년 수도'를 자랑하면서 역사의 흔적을 마구 지워버려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스쳐가는 것들이 좌충우돌할 뿐 혼(soul)과 정신(spirit)이 없는 도시라는 지적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G20 국가정상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국력을 기울여 회의를 성공으로 이끈다면 국제적 찬사가 쏟아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찬사가 바로 서울의 품격과 한국의 국격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국격과 국가브랜드 이미지 또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국가 브랜드이미지 하면 'Made in Germany' 와 'Made in Japan'을 떠올린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소비자들은 이들 나라의 제품이 좋은 재료로 만들어졌고 튼실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이 때문에 값이 비싼 감이 있어도 곧잘 구입한다. 브랜드의 프리미엄이다.
반면 우리의 'Made in Korea'는 이들 제품에 비해 아직도 평균 30%이상 저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이 때문에 삼성과 LG 현대 등 한국의 글로벌기업들은 제품에 '메이드 인 코리아' 표기를 꺼려해 미국 대학생의 42~58%가 이들을 일본이나 유럽기업 정도로 잘못 알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브랜드파워는 그 나라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준다. 중국의 가전상표 하이얼은 독일어처럼 들리는 이름덕분에 독일제라는 인상을 심어 서유럽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들린다. 미국 뉴저지의 아이스크림 메이커가 낙농에 관해 세계 최고라는 덴마크를 연상케 할 의도에서 상표이름을 '하겐다즈'로 만들어 국제적으로 성공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수한 품질과 국격은 별개다. 일본과 독일의 국격이 그들 제품의 품질만큼 높은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게다가 기업의 글로벌화와 생산기지의 현지화로 제품의 국적은 날로 모호해지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내세우지 않는 삼성과 LG, 현대의 글로벌 성공이 '메이드 인 코리아'의 브랜드파워와 한국의 국격 향상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나라마다 문화 역사 종교 전통 법체계가 다양하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국격의 기준을 말하기는 어렵다. 국격이 고결한 나라는 대체로 품격 있고 성숙한 세계국가일 것이다.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체제, 서로 간에 문화 차이는 인정하고 존중하면서도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 눈앞의 현재를 넘어 함께 내일을 열어가려는 미래지향성,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인간화를 으뜸가치로 추구하는 나라를 의미한다.
사람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고결한 의무)가, 기업에는 이윤과 고용창출에 더 해 사회적 책임이 최고가치가 되는 사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위기에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평정심이 굳건한 사회를 말하리라.
밀어붙이기식 국정운영으로 극한대립이 체질화돼 있는 나라, 정부정책에 대한 언론비판을 형사 소추하는 나라, 재판결과에 항의해 대법원장에게 달걀을 던지는 나라, 언론이 편을 가르며 사회의 균형추 역할을 스스로 포기한 나라, 사면권 남용으로 범법자에 '사법로또'를 무시로 안기는 나라는 '국격'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
진정 국격을 높이려면 국격을 높이려는 노력과 그 과정부터 품격이 있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우리의 국격이 평가받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