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경제의 더블딥(불황을 벗어난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현상) 우려에다 유럽 재정위기, 그리고 미국 국가신용등급의 강등이 겹치면서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대외변수에 유독 취약한 한국증시가 요동을 치고, 외국인들이 다투어 주식을 내다팔면서 코스피 지수는 엿새 연속 2% 이상씩 하락하며 370포인트가 넘게 폭락했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불길한 경고를 입증하듯 한국증시의 주가는 일본 중국 대만 등 여타 아시아국 증시보다 낙폭이 배 이상 곤두박질치고 있다.
한국경제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불안하다고 빠져나가고, 상황이 좋을 때는 다른 안전자산으로 갈아타기 위해 한국주식을 쉽게 내던지는 외국투자가들, 그래서 한국주식은 외국인투자가들이 언제든 쉽게 처분해 현금화할 수 있는 '현금인출기'로 통한다. 국내 연기금이 죽을 힘으로 떠받쳐도 외국인의 순매도에 대응하기는 역부족이다. 이 무슨 '개방경제의 저주'인가.
미국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이론적으로 신흥국 금융자산의 매력이 높아져야 맞다. 하지만 현실은 미국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갈아타기 위해 한국 같은 신흥국 주식을 가장 먼저 내다판다. 신용등급 강등으로 국채 발행 물량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또 미국경기가 다시 침체되면 그래도 믿을만한 안전자산은 미국국채밖에 없다며 앞다투어 선호하기 때문이다.
미국 발 더블딥 우려가 등장한 지난 2일부터 엿새동안 외국인들은 3조 2000억원 넘게 팔아치웠다. 일본 노무라증권이 최근 한 보고서를 통해 "유럽 재정위기로 아시아에서 한국의 타격이 제일 클 것"이라고 일찌감치 '방정'을 떨었고, 미국 모건스탠리는 "아시아 8개국 중 한국의 은행들이 충격 흡수에 가장 취약하다"고 우리의 약점을 들추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국이 아시아국가 중 독일과 프랑스계 은행의 자금유입이 가장 많고, 유럽에 대한 수출비중 또한 중국 다음으로 크다는 데 주목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우리정부가 발행하는 외화 채권에 대한 5년 만기 신용부도스와프(CDS)의 프리미엄, 즉 가산 금리는 1년 2개월 만에 최고치로 뛰어올랐다. 그만큼 국가부도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때와 같은 '셀 코리아'의 악몽이 재현될 것인가. 2008년 한 해 동안 외국인은 국내주식시장에서 45조원을 순매도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지분율은 2007년 말의 34.2%에서 28.7%로 급감했다. 이번 2조여 원의 투매는 절대규모면에서 2008년과 비교하기에는 이르다.
주식만 내다 팔았지 채권시장에서는 투매가 없었다는 점도 우리에게는 위안이다. 외국인들은 국채와 회사채를 합쳐 지난 4일 3146억 원어치를 순매도했으나 5일 곧바로 1073억 원 순매수로 돌아섰다. 앞서 1~3일에도 계속 우리의 국공채를 사들였다.
원화를 국내 투자계정에 넣어놓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외환시장은 큰 변동이 없고, 수출전망 또한 어둡지 않아 급격한 신용경색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3110억달러(7월 말)에 달하는 외환보유액도 과거와는 다른 안전판이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리스크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크게 개선되지 못한 상태라는 점이다. 단기외채가 1467억달러(지난 3월 말 현재)로 작년 말보다 8.7% 증가했고 전체 외채 가운데 단기외채 비중은 49.1%로 다시 높아졌다.
증권·채권 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은 31%대로 다시 높아져 아시아 주요증시 가운데 대만에 이어 두 번째다. 수출의존도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달러유출로 원화 값이 약세가 되면 수출의 가격경쟁력에는 보탬이 되지만 글로벌 경기가 악화되면 손실이 훨씬 크다. 올해 2분기 GDP(국내총생산) 대비 수출비율은 52.7%로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70년 이후 가장 높았다.
외화유동성에는 문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모건스탠리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대외 부채상환능력 비율(coverage ratio)과 예대율(LDR) 순위는 아시아 8개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외환보유액도 GDP의 36%(작년 12월 말 기준)로 아시아 평균(65%)의 절반수준에 불과하다. 가계부채 위험에다 외화건전성 확보 등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금융위기는 표면상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촉발했다. 그러나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고, 설사 신용등급이 내려가더라도 미국의 국가부도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세계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최악의 경우 달러화 가치 하락을 각오하고 얼마든지 돈을 찍어 낼 수 있어 돈이 부족해 부도가 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미국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진다는 '더블딥 공포'를 원인으로 들지만 여러 지표들의 동향을 볼 때 성장세가 더딜 뿐 다시 침체에 빠져들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내용적으로 유럽의 재정위기 쪽이 더 심각하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재정위기가 당장 글로벌 금융패닉을 촉발할 정도의 돌발적 대형악재로 보기는 어렵다.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리먼브러더스 사태 같은 파괴적 돌발악재가 없었는데도 글로벌패닉이 일어난 연유가 궁금하다.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국가들은 재정확대와 양적완화 등 유동성 지원으로 경기회복을 떠받쳐왔다. 실물경제 회복은 지지부진했지만 유동성이 넘쳐나며 금융장세로 주식과 채권값은 올랐다.
문제는 이 유동성공급을 통한 경기부양책이 이제 거의 소진됐다는 점이다. 부채상환연장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긴축을 통해 부채규모를 줄이고 세금을 올리며 고통을 나눠 가져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미국의 '부도위기'는 부채한도를 증액하고 돈을 찍는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워싱턴의 정치'가 신뢰를 상실하면서 불거졌고, 여기서 비롯된 불안감과 신뢰의 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묻지마 투매'의 패닉으로 이어졌다. 전 세계 주가의 동반폭락은 경기침체를 스스로 앞당긴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독약이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국가 간 긴밀한 공조와 협력, 투자가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글로벌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의 경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급격한 개방과 금융 자본거래 대폭자유화로 위기에 취약한 금융구조가 만들어졌다. 국제공조를 통해 단기투기자금 거래를 규제하면서 금융부문 대외의존도를 줄이고, 동시에 금융회사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위기 때마다 '개방경제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글로벌 금융파고(波高)에 대비해 체계적으로 방파제를 쌓고, 심한 요동을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체질을 단련해야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금융개방과 자율화가 외국 투자가들의 '머니게임'에 투전판을 마련해주는 한 패닉은 또 다른 패닉으로 이어질 뿐이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