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금 주주권 행사, '경영 빙하기' 오나?

국민연금공단 등 연기금(年基金)의 주주권 행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한나라당 새 지도부가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조건부로 합의하고, 강하게 반발하던 재계도 정부정책에 동참하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정부도 이에 화답하듯 주주권 행사는 포스코나 KT 등 주인 없는 기업들 견제에 주력할 것이라며 '전의'(戰意)를 누그러뜨렸다.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기업들의 주주총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내년 3월부터 본격 행사되며 중요한 경영 사안에 대해 사후보다는 사전에 공시하도록 연기금이 의결권을 행사하고 사외이사도 대거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주주권 행사의 설계자인 곽승준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은 대기업의 관료주의와 오너의 독단경영을 막고, 대기업-중소기업 상생과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연기금이 사외이사를 파견해 대기업 경영을 감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 등 경제부처 장관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치 않아 정부 여당이 보폭을 맞추며 삼성, 현대차, LG, SK, 포스코 등 거대기업 압박에 들어간 셈이다.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동반성장과 함께 경제계 최대 쟁점 중의 하나였다. 곽승준 위원장이 지난달 26일 처음 이를 들고 나왔을 때 재계는 '공권력의 기업경영 간섭', '연기금 사회주의'라며 펄쩍 뛰었고 청와대마저 '곽위원장 개인의견'이라고 선을 그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한 달도 채 못 돼 정부방안으로 정해져 추진하게 된 것이다.   

물꼬를 튼 것은 이명박(MB) 대통령이었다. MB는 지난 16일 중소기업인과의 간담회에서 "대기업 총수의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며 재벌오너들이 상생과 동반성장에 직접 관심을 갖고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와 기술 빼가기 등에 대한 개선방안을 공개적으로 주문했다.

곽 위원장이 한나라당 이주영 정책위의장을 만나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당의 협조를 구한 것은 MB의 이 같은 발언이 나온 직후였다. 이주영 정책위의장은 관치우려를 불식하는 장치마련을 전제조건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주식의결권을 행사할 때는 정부의 개입없이 민간인들로 구성된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고, 곽위원장은 법을 바꾸지 않아도 기금운영위 산하에 '의결권 소위'를 구성하고 민간인들을 주축으로 투명하게 운영토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나라당이 입장을 번복함으로써 재계는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기분'이지만 정부가 대기업들에 대한 사정의 강도를 높이자 겉으로는 한 발 물러선 모습이다, 그러나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해 재계를 희생양 삼아 반(反)시장적, 반대기업적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고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주는 자신이 가진 지분만큼 의결권을 비롯한 각종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해외에서는 연기금들이 오래 전부터 주주로서의 권리를 적극 행사해 오고 있고, 유럽에선 주가상승보다 중장기적으로 기업이 사회책임을 다하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하는지에 더 중점을 두고 주주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

유독 국내에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에 반발이 거센 것은 국민연금이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 기업경영에 정부가 간섭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 소수의 지분을 가진 총수 일가가 지분 대부분을 가진 것처럼 경영권을 장악하는 한국적 기업지배구조 때문에 기업들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현실도 한 몫 한다.

재계의 격한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재계의 리더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공개적인 주주권 행사는 오히려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삼성 주변에서는 '주주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원칙론을 언급한 것이며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눈치다.

반면 '5%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 같은 것에 삼성전자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삼성전자 지분의 51.3%를 가진 외국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건희 회장(지분 3.38%)의 경영권을 얼마든지 흔들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 회장과 삼성전자가 잘하고 있다고 외국인들이 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국민연금은 300조원이 넘는 돈을 운용하면서 5%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만 139개에 이른다. 총수의 전횡과 대기업의 거대 관료주의를 견제하고 시장의 공적 기능강화를 위해 연기금이 필요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주주권 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한국 자본주의를 성숙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주요기업들의 외국인지분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국민연금이 경영권 방어에 우호세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재계는 전문성 없는 연기금이 기업의 효율적인 판단을 막아 기업 가치를 떨어뜨릴 것으로 우려한다. 기업경영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규제이고 글로벌경영의 발목을 잡는다는 항변이다.

민간 전문가들로 '의결권 소위원회'를 구성해 의결권을 맡긴다고는 하지만 '관치(官治) 꼬리표'를 떼기 위해 민간이라는 외피를 씌우는 꼼수일 뿐 독립성은 담보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재계는 내년 4월 총선을 전후해 일련의 '대기업 때리기'로 '경영 빙하기'가 도래할 것으로 우려한다. 내년 3월 주총시즌에 '본때를 보이는' 차원에서 연기금들이 힘을 합쳐 특정 대기업의 핵심경영안건을 부결시키는 등의 실력행사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사와 주요 주주의 직계가족이나 친인척과 거래할 경우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개정상법이 내년 4월 발효되고,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들고 나온 초과이익공유제도 내년 초부터 본격 도입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놓고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이 벌이는 밥그릇 싸움도 정부가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대기업들을 몰아붙이면 기업의사결정이 '올 스톱'되고 정치권이나 여론 눈치만 살피며 무위도식하는 '경영 빙하기'로 접어든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재벌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개발독재시절 이상의 공룡이 되고 있고 '재벌관료주의'의 폐해 속에 중소하청업체들은 '재벌동물원'에 갇혀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비유마저 나돌 정도다.

MB와 한나라당이 정체성을 훼손해가며 대기업을 압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경제의 양극화는 사회적 인내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특단의 상생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내년 3월까지 시간은 많지 않다. MB정권과 재계간의 기싸움과 대기업 압박 작전이 '경영 빙하기'가 아닌, '찻잔속의 태풍'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