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 대재앙 뒤의 '외양간 고치기'

지난해 11월 29일 경북 안동에서 처음 확인돼 겨울 내내 전국을 뒤흔들었던 구제역(口蹄疫)이 마침내 진정 국면을 보이고 있다.

김황식 국무총리는 지난주 대국민 담화에서 구제역에 대한 안정적인 통제가 가능하다고 판단해 위기경보단계를 '심각' 단계에서 '경계' 단계로 낮춘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5일 이후 구제역 신규 발생이 없는 데다 매몰처리도 지난 23일 이후 단 한건도  보고되지 않고 있다. 구제역에 따른 가축이동 제한도 충청남도 보령, 홍성 두 곳만 남기고 모두 해제됐다고 한다.

국내에서 다섯 번째 발생한 구제역은 11개 시·도, 75개 군에서 150건이 발생해 돼지 331만 마리와 소 15만 마리 등 347만여 마리의 가축을 도살처분 및 매몰한 뒤 봄이 돼서야 사실상 종식된 셈이다.

보상비, 방역비, 매몰비를 포함한 국고지원액만도 2조8000억 원이 넘었다. 대규모 매몰에 따른 환경오염 등 2차 피해 우려는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지방공무원·군인·경찰·소방관 민간인 등 모두 197만 명이 '구제역과의 전쟁'에 동원됐고 공무원 8명이 방역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50년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악의 구제역"으로 규정지었다. 작은 구제역 바이러스에 대한민국의 넋이 나갔고, 아비규환의 살(殺)처분 광경이 CNN방송 등에 적나라하게 방영되면서 국가적 망신도 톡톡히 당했다.

대재앙의 요인은 '국가의 실패'로 요약된다. 초보적인 매뉴얼은 있었지만 그나마도 관리 부재로 작동되지 못했다. 두 차례 구제역을 겪고 난 뒤인 2003년 발간된 '구제역백서'에는 접종단계별 시스템 구축과 읍·면까지 축산전문가 배치 등이 명기돼 있었지만 실천이 없었다.  

2003년에 503만 마리분의 백신이 있었지만 지난해 말 보유량은 30만 마리분에 불과했다. 전문가와 인력 부족으로 공무원이 과로로 순직하는 사례도 잇따랐다. 바이러스는 갈수록 펄펄 나는데 방역체계는 도리어 뒷걸음질 친 것이다.

일부 축산 농가들도 책임을 면키 어렵다. 방역을 철저히 하고 청결하게 관리한 축산 농가들에는 구제역이 접근하지 못했다. 한 마을이 똘똘 뭉쳐 구제역을 막아낸 사례도 심심찮게 보고됐다.

자기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했는데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농장주도 없지 않았다. 소 돼지가 사라진 텅 빈 축사에 감성적으로 초점을 맞춘 보도자세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일부 축산농가의 살처분 거부와 높은 보상비 요구를 부추기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구제역은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백신접종으로 구제역 바이러스가 축사와 가축으로 숨어들어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최소 2-3년 동안 정기적인 백신접종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완전 종식까지는 2-3년이 걸린다는 얘기다.

'백신 접종 청정국' 지위를 하루 빨리 획득하는 것이 정부의 당면 목표지만 이 역시 간단치가 않다. 이 지위를 신청하려면 정기적으로 백신을 접종하고, 구제역이 2년 동안 발생하지 않아야하며, 최근 1년간 바이러스가 없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만 한다.

백신 접종 청정국이 된다 해도 이를 실질적인 청정국으로 인정해 주는 나라는 거의 없고 통상적으로 구제역 발생국가와 마찬가지로 취급받는 현실이다. 실질적인 청정국이 되려면 백신접종을 아예 중단해야한다. 청정국으로 가는 길이 그만큼 멀고, 최소한 3-4년 이상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정부는 구제역과의 전쟁이 끝나는 시점에 방역체계를 개선하고 질병발생 환경을 예방적으로 개선하는 축산업 선진화방안을 발표했다.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농림수산식품부 등 5개 부처가 합동으로 마련한 구제역 종합대책은 '자연 사람 동물이 행복한 청정·선진축산'을 표방하고 있다.

그 핵심은 초기방역체계 대폭 강화다. 악성질병이 발생하면 곧바로 위기경보 최고단계인 '심각'을 발령하고 해당농장과 전국의 분뇨·사료차량의 이동을 통제한다. 일정 규모이상의 질병이 발생하면 군부대 투입을 제도화하고, 공항소독 의무화는 일반인까지 확대한다. 이번 구제역 확산이 초동대응실패에서 비롯됐다는 뼈저린 교훈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방역선진화'에 치중했을 뿐 정작 '축산 선진화' 대책은 크게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구제역 재앙의 근본원인은 밀집사육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사료 공급과 분뇨처리 등의 기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사육마리 수만 늘린 탓에 면역력이 떨어지고, 한번 병에 걸리면 순식간에 번진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 같은 진단에 동의해 지역별로 사육마리수를 제한하는 총량제 도입을 적극 검토했지만 축산농가의 반발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내년부터 대규모 축산농가에 한해 축산업허가제를 도입하고 중소규모 농가에는 모두 등록제를 적용하는 선에서 절충했다. 가축 마리당 사육면적을 넓히고 분뇨처리시설을 개선해 질병면역력을 키우는 등의 사육환경 개선방안은 빠진 것이다.

농가가 기를 수 있는 가축마리수를 정부가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은 사유재산권침해로 비칠 수도 있다. 허가제 기준을 잘 운용하면 사육규모제한과 같은 효과를 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미 허가를 받은 농가나 허가대상이 아닌 농가가 규모를 늘리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그럴수록 농가의 책임감을 높이는 보완대책은 절실하다. 방역의 1차 책임은 농가이기 때문이다. 매몰처분가축에 대한 100% 시가보상제도가 축산농민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구제역 발생 초기 단계에 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질책에 김황식 국무총리는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방역관에 대한 사전교육 부재로 조기발견 기회를 놓쳤고, 살처분을 고집하다 백신투여가 늦어져 구제역을 확산시킨 측면도 무시하지 못한다. 생매장 살처분을 가속화시킨 '예방적 살처분' 개선방안도 과제다.

우리를 둘러싼 아시아 19개국이 모두 구제역발생지역이다. 김포·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화물의 60%이상이 동남아에서 들어온다. 철새나 먼지로도 쉽게 옮길 수 있어 살처분 만이 능사가 아니다. 돼지 닭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10-20종의 백신을 맞는 상황에서 구제역 백신 하나 추가된다고 큰 문제가 되느냐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백신투여와 살처분을 적절히 병행하고 소각이나 비료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해 매몰에 따른 부담과 환경문제를 최소화해야한다. 이미 사의를 표명한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등 책임자들에게는 과감하게 책임을 물어 분위기부터 쇄신해야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종합대책으로는 구제역 위기를 한국 축산업 선진화의 기회로 바꾸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