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대(對) '이익의 균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재협상이 진통 끝에 타결됐다.

당초 우리 정부는 "협정문에서 점 하나도 고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FTA 논의는 실무차원의 추가적 협의임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미 서명까지 마친 협정문을 고쳐 새로 협정문을 만들고 국내비준절차를 다시 밟게 됐다는 점에서 추가협상보다는 재협상이란 표현이 제 격이다.

한국이 미국 압력에 밀려 재협상에 응할 때부터 한국의 '양보'는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협상단은 동맹보다는 '이익의 균형'을 강조하며 '윈-윈'을 이끌어낸다는 전략으로 임했지만 결과는 '동맹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다.

협상결과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양국의 이익을 서로 균형 있게 반영해 상호 윈-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 강력한 동맹의 승리"를 내세웠고, 존 케리 상원외교위원장은 "이번 합의는 한반도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방국인 한국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동맹쪽에 방점을 찍었다. 애초부터 '이익의 균형'은 '동맹의 고려' 앞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협상의 모양새는 서로 주고받기 식 협상이었다. 자동차를 양보하는 대신 돼지고기, 의약품, 비자연장 등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익의 균형은 미국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었다.

FTA 타결로 당장 자동차 부문에서 우리 이익이 클 것으로 기대됐던 부분은 대부분 4년 뒤로 미뤄졌다.

한미 FTA 타결의 최대성과물을 3년 8개월 뒤 재협상으로 미국 측에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 말았다. 우리도 같은 혜택을 얻었다고 협상단은 주장하지만 미국산 자동차의 국내수입이 연간 1만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억지 변명에 가깝다.

차종별 관세철폐시기도 미국이 피해를 겁내는 화물트럭은 관세철폐시기를 연장하고 미국이 경쟁력을 갖춘 전기자동차는 관세철폐 시기를 대폭 앞당겼다.

게다가 신설된 자동차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수출을 많이 하는 한국에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동차업체들의 미국 현지생산비중이 크게 늘고 있어 세이프가드 발동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우리정부는 극구 해명하고 있지만 이는 FTA의 기본정신에 위배되는 독소조항이다.

반면 미국 차의 한국시장 접근 문턱은 크게 낮아졌다. 미국이 대표적인 비관세장벽이라고 주장해온 안전기준과 연비 배기가스 등의 환경기준 적용이 크게 완화됐다.

당초 협정문에서는 연간판매대수 6500대 미만인 차량에 대해서만 미국 자동차 안전기준을 통과하면 별도조치 없이 곧바로 한국 내 판매가 가능토록 했으나 이번에 그 기준을 연간 판매대수 2만5000대 미만으로 4배가량으로 늘렸다.

국내에서 인기가 높은 미국산 자동차 차종이 연간 판매대수 5000대를 넘지 못하는 현실에서 미국차들은 상당기간에 걸쳐 예외를 인정받게 됐다.

연비 및 온실가스배출기준 등 환경기준도 미국산자동차는 판매대수 구분 없이 2007년 FTA합의이후 한국의 강화된 기준에서 20% 완화된 기준을 적용받게 됐다. 안전과 환경문제에 대해 과도하게 예외를 인정한 게 아니냐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동차 대신 돼지고기와 의약품, 비자에서 우리가 얻어낸 이익의 규모는 계량화가 어렵지만 자동차부문에 비하면 미미해 보인다. 냉동돼지고기 수입관세 철폐시기 2년 연장을 얻어낸 것은 큰 성과지만 시장규모가 2억 달러에도 못 미친다. 

의약품 허가·특허연계의무 3년 연장으로 신약출시 비중이 낮은 국내 제약업계가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연계의무 폐지가 아닌 3년 유예는 큰 도움이 못 된다.

특히 이 부문은 한·유럽연합(EU) FTA가 시행되면 유럽 쪽으로 수입 선(先)이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 우리입장에서 실익이 크지 않다.     

자동차부문에서 세이프가드를 용인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대가로 한국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금융 분야에서 세이프가드를 얻어냈어야 했다.

투자자의 국가소송제(ISD), 또 일단 개방되면 되돌릴 수 없는 역진방지 등 '독소조항'들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아쉬움은 더 한다.

이 모든 것이 한미동맹 때문에 불가피했다면 '이익의 균형'이라는 둘러대기 변명보다는 차라리 '동맹을 위한 비용'으로 솔직히 고백하고 국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호소하는 편이 조속한 국내비준을 위해 훨씬 나은 길이다.

이미 서명까지 마친 협정문을 재협상으로 고치는 선례를 남긴 것은 두고두고 부담이다. 앞으로 다른 국가들과 FTA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데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FTA의 근본은 자유무역을 위한 관세철폐다. 관세를 철폐키로 이미 합의해 놓고 추가협의로  철폐시한을 뒤로 늦추는 것은 FTA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자동차부문의 양보가 유럽자동차업계를 자극해 한·EU FTA 도 재협상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재협상의 악순환'을 불러 올 우려도 적지 않다. 

한미 FTA체결이 양국 간 경제적 이익을 넘어 한미동맹관계를 격상시키는 전략적 효과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미 FTA를 미국과의 무슨 배타적 '경제동맹'처럼 과다한  의미를 부여함은 무리다.

한국은 'FTA 허브'를 자처하며 이미 16개국과 FTA를 체결해 발효시켰고 현재 12개국과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한미 FTA가 이들 여타국과의 FTA와 격(格)이나 등급이 다를 수는 없다. 한미 FTA가 한국의 대미편향을 더욱 부추긴다면 전략적 균형을 도리어 해칠 수 있다.

FTA는 그저 FTA 일 뿐이며 문제는 고약한 'FTA의 정치'다. 

FTA는 국제협상 못지않게 국내협상이 중요하다. 협정체결 절차 규정상 협상당국이 협상의 진행과정을 수시로 국회에 보고하고 의견수렴과 타당성검토를 거치도록 돼 있다.

이번 재협상과정에서 이런 절차가 미흡해 보수정당인 선진한국당 조차 비준거부를 공언하는 판이다. FTA협정이 타결되고 한국국회가 비준까지 해놓고도 3년 넘게 발효가 안 된 것은 미국정부가 그들 의회를 설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국내협상'에서 집요한 설득노력 없이 대미교역이 전체적으로 늘고, 한미동맹 강화로 북한에 무언의 압박을 주며, 동북아 지역 내 전략적 균형유지에 도움 된다며 잠자코 따라오라는 식의 일방통행으로는 초당적 협력을 얻어낼 수 없다.

비준은 할 때 하더라도 문제점은 제대로 짚고 가는 것이 한미 FTA의 앞날을 위하는 길이다.

자동차부문의 '굴욕적 양보'가 비준과정에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는 와중에 정작 이해당사자인 자동차관련업계가 '미국시장의 불확실성 해소와 부품관세 철폐로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정부와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FTA의 정치'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