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더 내게 해 달라 …미국 부자들의 '반란'

미국이 쇠락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 쇠락을 속단하기는 아직 이른 것 같다. 미국의 양심이 녹슬지 않고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연간 소득 100만 달러가 넘는 백만장자 45명이 연명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올해 말로 끝나는 부자감세조치를 더 이상 연장하지 말도록  촉구하고 나섰다.

'탄탄한 재정을 위한 애국적 백만장자들'(Patriotic Millionaires For Fiscal Strength)은  홈페이지에 올린 공개서한에서 자신들에 대한 감세는 재정적자를 늘리고 여타 납세자들에게 부담만 가중시켰다며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의 부자감세연장 압박에 휘둘려 중심을 잃지 말고 당초 공약대로 부자감세혜택을 금년 말로 끝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나라 보다 정치를 앞세우는 것에 결연히 맞서기로 했다며 미 국민들은 정당하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재정건전화 의무를 이행해야하며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에 대한 감세혜택 종료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에 '오마하의 현인' 이자 세계 3위의 억만장자 워런 버핏이 가세했다.

버핏은 미국 ABC방송과의 추수감사제 특별인터뷰(28일 방영)에서 미국의 부자들은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어야 한다며 부시행정부 시절의 부자감세혜택은 금년 말로 종료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세혜택을 준다면 저소득층과 중산층, 어쩌면 상위 중산층에 추가로 더 혜택을  주어야지 나 같은 최상위 소득자들은 세금을 더 내야한다. 세금을 더 내더라도 부자들은 전보다 형편이 더 낫다"고 이유를 스스럼없이 밝혔다.

부자들은 세금을 깎아주면 그 돈으로 소비가 촉진되고 그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내려갈 것이라고 곧 잘 주장하지만 이 트리클다운(trickle-down:낙수효과)은 지난 10년간 작동되지 않았으며 이제 미국의 대중도 이를 깨우치기를 희망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버핏과 빌 게이츠 등 미국의 내 노라 하는 억만장자들이 상속세 인하에 반대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소득세의 감세철회를 넘어 증세 주장은 다소 충격적이다.

버핏은 지난 달 "내 사무실의 전화 받는 직원과 청소부들의 세율이 나보다 더 높다" "부유층 세율이 더 낮은 미국이 제 정신이냐"며 '부자 증세'를 주장했었다. 또 아놀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부자증세를 요구했지만 그 자신이 부자인 슈워제네거 지사는 이를 묵살한 바 있다.

버핏의 ABC방송 특별인터뷰는 추수감사제를 맞아 버핏, 그리고 빌 게이츠와 그 부인 메린다 게이츠 등이 주도하는 주요 자선프로젝트들을 조명하는 특집의 일환으로 그 주제가 '나눔의 서약'(Giving Pledge)이었다.

애국적 백만장자들의 공개서한에다 버핏의 증세요구 인터뷰가 방송도 되기 전부터 언론에 흘러나오면서 부자감세철회는 '부자증세'로 국면이 뒤바뀌고 있다.

부자감세혜택이 종료되면 경제성장이 지장을 받는다며 부유층까지 포함한 전면적인 감세연장을 벼르고 있는 공화당 입장에서 느닷없는 '부자들의 반란'이 아닐 수 없다.

'애국적 백만장자' 홈피가 밝힌 통계에 따르면 연간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는 37만5000명이다. 미국민의 1%에 불과한 이들의 소득은 1979년부터 2007년 사이 281%가 급증했다.

반면 이들 소득에 대한 최고세율은 1963년 91%에서 1976년 70%, 그리고 현재는 35%로 격감했다. 이들은 미국의회 의원들의 44%가 백만장자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의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부자감세의 연장을 도모하는 측면이 있음을 내비쳤다.

소득상위 2% 계층에 감세혜택을 연장해 줄 경우 앞으로 10년간 7000억 달러의 재정 손실이 빚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오바마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감세연장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공화당과 보수진영의 경제학자들이 이들 '슈퍼 리치'(Super Rich)에 대한 감세연장을 강력하게 고집해 공화당과의 타협여지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세금을 낼 당사자들이 감세연장은 고사하고 세금을 더 거둬달라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물론 버핏의 증세주장에 "일률적으로 세금을 더 내기보다는 형편이 나은 부자들이 기부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고소득자도 없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나라가 재정적자로 어려운 상황에서 부자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점이다. 가진 자들의 솔선수범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철강 왕 앤드루 카네기는 일찍이 '부자로 죽는 것은 수치'라는 명언을 남겼다.

생전에 재산을 움켜쥐고 구두쇠 노릇하다 죽고 난 뒤 엄청난 재산을 남기는 부자들을 빗댄 말이다. 사상최대인 435억 달러를 기부한 버핏은 "살아 있을 때 돈 쓰는 일에 현명해지라"고 주문한다.

이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돈 모으는 재테크보다 모은 재산을 살아 생전에 잘 나눠주는 '나눔의 기술'이 갈수록 부자의 덕목으로 주목받고 있다.

미국은 초고액 기부자의 나라다. 미국 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와 극심한 불평등을 동시에 창출해 승자들은 그들의 재산 일부를 가난한 패자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불문율처럼 깔려있다. 19세기 자본가 카네기와 록펠러가 이런 인식을 주도했다.

20세기말 이후 자산가격상승과 세계화, 정보기술 및 금융혁신 붐을 타고 세계적 갑부들이 대거 출현하고, 자신들에 엄청난 부를 안겨준 세상에 대해 뭔가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이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재산을 그냥 쾌척하는 통상적 자선가와는 달리 자선프로젝트에 투자해 더 큰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전략적 자선가'도 등장했다.

설립자가 죽은 뒤 초심을 잃고 유명무실해지는 자선재단들보다 훌륭한 자선재단을 골라 생전에 쾌척함이 나눔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자선의 경제학', 버핏과 빌 게이츠의 'B'를 따 '빌랜스로피'(Billanthropy)로 불리기도 한다. 

'부자감세 철회'로 논란을 빚고 있는 우리입장에서 미국부자들의 증세요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의 선진화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30개국 가운데 24위며, 특히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꼴찌라는 몇 달전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결과를 새삼 떠올릴 필요가 없다.

세금과 준조세 때문에 투자와 성장이 안 된다고 볼이 멘 우리의 부자들에게 "시장경제체제는 가난한 사람 위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버핏의 경고가 생뚱맞을 수도 있다. 

부의 철학과 모럴이라면 굳이 남의 나라사례를 들 출 필요가 없다.

나눔과 베품으로 그들의 재산을 370년간 유지해 온 경주 최 부잣집 가훈이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 것,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 것,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할 것, 시집 온 며느리들은 처음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을 것, 자기 집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이 그것이다.

부를 탐해 권력주변을 기웃거리는 일이 없고, 필요한 것 이상은 나눠주고, 모두가 어려울 때는 투기를 않고, 부자일수록 검소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책임질 줄 아는 부자,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