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태로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중대 변화의 기로에 섰다.
최근 들어 대북수해지원과 대승호 선박 선원 송환, 이산가족 상봉논의 등이 꼬리를 물면서 남북관계에 해빙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인도주의를 매개로 한 남북 간 소통이 국면전환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아직은 속단을 불허한다. 그러나 긴장 완화의 낌새는 범상치가 않다.
북측은 최근 우리 측 수해복구지원 제의에 쌀과 시멘트 굴착기 등을 보내달라고 역제의를 해 왔다. 그러면서 대승호와 선원을 송환해주고, 적십자사 채널을 통해 추석을 맞아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갖자고 제의해왔다. 우리 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산가족상봉을 정례화하자고 맞제의를 보내는 등 남북 간 '장군 멍군'이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국영TV에 출연해 남북관계 정상화를 바라고 있다며 '제2개성공단'을 언급하고, 야당의 원내대표가 남북정상회담을 대놓고 촉구하는 등 대화분위기는 갈수록 고조되는 양상이다.
이 같은 남북관계 흐름을 놓고 일각에서는 남북 간 우회적 또는 비공식 접촉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청와대가 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남북한 고위관계자가 지난달 중순 개성에서 비밀접촉을 가졌다고 12일 서울발로 '복수 관계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 접촉에서 한국 측은 천안함 사건 사죄와 비핵화를 향한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했고, 북측은 '햇볕정책'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우리 정부의 공식 부인(否認)은 지난해의 남북 간 비밀접촉에 비춰볼 때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관측도 끈질기다.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지난해 10월 당시 임태희 노동부장관과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장 간의 싱가포르 접촉, 그리고 11월7일, 14일 통일부 간부 K씨와 북한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 간의 개성 접촉에 대해서도 정부 당국은 부인으로 일관했지만, 나중에 거의 사실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북한의 수해지원 요청을 정부가 언론보도 전까지 사실상 숨겼고, 북측의 이산가족상봉 제의도 북측 매체 보도를 통해 알려진 후에서야 정부가 공개한 점도 정부의 '공식 부인'을 쉽게 믿지 못하게 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로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은 남 북 모두에게 절실하다.
북측은 심각한 경제난과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체제안정을 위해 남측을 비롯한 외부 지원이 절박한 상황이다.
우리 정부 역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앞두고 안정적인 남북관계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임기 절반을 넘긴 이명박 정부 입장에서 남북관계에 뭔가 성과를 내야할 필요성도 절실한 시점이다.
일각에서는 여권 중진인사가 개성접촉에 나섰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다.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접촉으로까지 이어졌던 지난해와 유사한 흐름으로 남북관계가 전개되고 있다는 분석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사태 등 북한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도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며 북한의 잘못된 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책의 일관성 유지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건전한 남북관계 형성에 긴요하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강경한 대북정책의 일관성 유지에 따른 현실적 대가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우선 오는 11월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에 필수적인 안전 문제가 부담이다. 이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중에 평화적 남북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소진된다는 점도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지난해 단 한 차례만 성사됐던 이산가족 상봉 기회를 올해는 한 번도 마련하지 못하고 해를 넘겨야 하는데다,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능성을 무릅쓰고 대북 강경책을 추진하는 것도 정치적 차원은 물론 경제적 차원에서도 적잖은 부담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부담들 때문에 이 대통령이 북한을 압박하는 방식의 정책기조를 언제까지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을 지가 주목받아온 터였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이 대화국면에 접어들고, 미국 정부의 대북기조가 천안함 사건에 따른 제재 일변도에서 대화국면으로 이동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미국정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북한의 '성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한국 정부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북한 비핵화 문제가 아무런 진전 없이 시일을 허비하는 상황은 더 이상 용인하기 힘들다는 쪽으로 입장을 재정립하는 분위기다.
최근 커트 캠벨 미 동아시아 태평양 차관보가 "6자회담에 진전이 있으려면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조치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요구했고, 북한이 이에 화답한 모양새로 미루어 미 북한 간 뉴욕채널이 재가동되고 있을 가능성도 점쳐지는 상황이다.
중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 우다웨이(武大偉)의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순방,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동아시아 순방행보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묘한 기류변화를 읽고도 남는다.
보즈워스 대표가 북한의 기류를 확인하고 미 중 간 큰 틀의 합의를 바탕으로 6자회담 재개와 관련한 전향적인 메시지를 내놓을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그리 머지않은 시기에 북한과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낙관한다'는 그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모든 정황을 감안할 때 올 연말부터 6자회담 재개 프로세스가 본격화되고, 이 상황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이 강요되는 국면이 조성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천안함 사태 이후 국내 보수 세력의 반북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이벤트 성 이산가족 상봉으로 천안함 사태가 당장 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남북 간 긴장이 다소 풀리고, 6자회담이 재개되면 그 틀 속에서 남북이 자연스레 천안함 문제를 짚고 넘어갈 수도 있다. 전격적으로 제3차 정상회담을 통한 돌파구 마련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남북 간 강경대치는 남 북한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에는 어떠한 대화도 않겠다던 북한이 유화책으로 돌아섰다. 한국의 대북 강경일변도는 한미-북중 대결구도를 심화시켜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중국에 더욱 예속시킬 우려가 다분하다.
미 중 화해무드 등 바깥기류 변화로 한국이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조성되기 전에 주체적으로 대북 돌파구를 여는 것이 바람직하다.
'쌀 대신 햇반' 같은 속 좁은 대응은 소탐대실의 우려가 크다. 대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할 때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