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자기도취에 빠져들고 있다. 금융위기 탈출의 모범국가, 주요 20개국(G20)정상회의 의장국, 삼성 현대차 LG 등 주요 글로벌기업들의 약진, 게다가 동계올림픽의 기대 밖 선전은 우리 모두에게 아찔한 성취감을 안겼다.
해외언론들로부터 찬사가 꼬리를 물고, 국운(國運)상승 무드까지 얹히면서 우쭐함을 넘어선 자만의 경지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얼마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멀티미디어 가전박람회에서 "일본제는 무섭지 않다. 우리는 기초기술과 디자인에서 이기고 있다"고 호언했다.
최근 뉴욕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서 기획재정부 허경욱 1차관은 한국경제를 김연아의 올림픽 금메달 성공담과 연결시키며 "한국은 더 이상 약자(underdog)가 아니다"고 은근히 과시했다.
자신감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섣부른 자만은 금물이다. 1위라고 좋아하는 순간 그 회사는 위험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한국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기가 발생했을 때 가장 크게 충격을 받았던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은 벌써 잊었는가.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법이다. 회복속도는 작년 1, 2분기까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 중에서 가장 빨랐지만 3분기부터 크게 주춤해 진 상태다.
지난해 사상최대 무역흑자의 절반은 환율효과였다. 국내 대기업들은 아직도 이 '환율마약'에 취해 있다.
우리의 수출은 일본에서 핵심부품과 첨단소재를 수입하고 이들을 조립 생산해 중국 등지로 판매하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수출이 늘면 늘수록 일본기업들의 이익도 덩달아 늘어난다. 일본이 한국과의 무역에서 연간 3조 1천억 엔의 흑자를 보고 있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나마도 국내 글로벌기업들은 해외현지생산에 주력해 이들의 성공이 국내의 고용증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상 최대 규모의 청년실업에 업종별 기업규모별 양극화도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다.
'한국에게서 배우자'는 식의 바깥 찬사에는 '가시'가 숨어 있다. 한국에 대한 부러움이 경계심으로 바뀌고, '한국 때리기' 로 진전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일본의 경제산업성이 다음달 1일부터 한국전담부서로 '한국실'을 신설키로 했다.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무역정책과 산업정책을 전담하는 부서를 설치하는 일은 극히 이례적이다.
삼성과 LG 현대차 포스코 등 '한국의 4천왕에게서 일본의 활로를 찾자' 는 슬로건은 곧 한국기업에 대한 일본의 도전장이다. 기술력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인 일본기업들이 한국기업들 견제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발전소 수주에서 패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원전의 안전성에 순위를 매기자'고 주장했다. 원천기술이 없는 한국이 해외에 수출하는 원전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며 뭔가 벼르는 투다. 일본은 한국의 UAE 원전 수주 성공에는 민관일체, 특히 정부역할이 크게 작용했음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시장에서 한국자동차의 약진은 한국자동차시장에 대한 미국의 개방압력으로 이어진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한 미 자유무역협정을 조속히 비준해 한국자동차시장을 열어젖히라는 압력을 전방위로 받고 있다.
국내 글로벌기업들은 해외경쟁사들의 몰락에 따른 반사이익에다 환율효과로 글로벌시장에서 모처럼 승기(勝機)를 잡았지만 이를 승세로 굳히지는 못한 상태다. 제품만 잘 만들어서는 안 되고, 소프트웨어와 응용프로그램 등 시스템으로 승부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막대한 현금을 움켜쥐고 성취감에 안주(安住)할 때가 아니다.
경기회복에는 기업 등 민간부문보다 정부의 재정정책이 크게 기여했다. 이 때문에 지난 2년간 재정수지는 급속히 악화됐다.
한국이 위기를 잘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업보를 치룰 운명의 날(the day of reckoning)은 단순히 뒤로 미루어진 데 불과하다는 바깥의 견해도 있다.
가계 빚 등 민간부채와 정부부채를 합친 한국의 총부채는 2008년 국내총생산(GDP)의 308%에 달한다. 미국보다도 많고 영국 일본 스페인 다음이다.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다른 여타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 부채를 해소하거나 완화시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 및 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고, 가계의 이자부담증가를 우려해 금리인상을 유예시키고 있다. 이런 임시방책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에 위기를 뒤로 미루어놓은 데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국가채무는 올해 정부 예상치 로 GDP의 36.1%다. 100%가 넘는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세계가 부러워하는 건전재정이다. 공기업채무를 국가부채에 포함시키면 GDP의 60%선이다.
선진국들에 비해 재정에 '여유가 있다'고 보는 탓인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퍼주기 복지대책'에 여야가 따로 없다. 무분별한 재정지출확대로 선심을 베풀고 인기에 영합하는 이른바 '재정포퓰리즘'이다.
정부부터가 문제다.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4대강 사업이나 세종시 수정안 등은 금융위기극복과 상관이 없다. 게다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발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지역마다 온갖 장밋빛 지원과 혜택을 약속하고 있다.
국가채무증가속도는 지난 3년 동안 31.7%로 OECD회원국 평균(12.6%)보다 월등히 높고, 증가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아일랜드(33.1%)에 버금간다. 한국의 상대적인 재정건전성 우위는 큰 의미가 없다며 재정건전화 종합대책 수립과 세입기반확충을 조세연구원이 촉구할 정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선진국들 국가채무가 2차 대전 직후수준까지 치솟아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경기회복에 대한 확신을 해치고 있어 이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전설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는 미국국채와 중국부동산거품 붕괴 등으로 2012년까지 또 하나의 경기침체가 예상되며 이번의 침체는 각국 정부가 이미 '실탄'들을 모두 소진한 탓에 종전보다 훨씬 심각할 것으로 경고한다.
세계에서 고령화속도가 가장 빠르고, 사회보장수요가 급속히 높아지는 데다 통일까지 감안한다면 한국이야말로 재정의 실탄을 단단히 비축해 놓아야 한다.
북한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고, 체제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도 나도는 판이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우리경제에 또 하나의 거대한 불확실성이다. 자화자찬과 포퓰리즘을 접고 현실을 직시할 때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