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일명 '물컵 갑질' 논란이 조양호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밀수 의혹으로까지 번지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수십 년 동안 한진그룹 총수 일가가 대한항공 항공기를 통해 해외 명품의류와 사치품, 식품, 가구 등을 세관에 신고하지 않고 무관세 반입했다는 제보가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 사이에서 빗발치고 있다.
제보에 따르면 조 회장 일가는 부피가 있는 가구 등을 비행기 수리용품으로 허위신고해 국내로 들여왔다. 또 양배추, 체리 등 외국산 식품까지 승무원들이 실어 날랐다는 제보와 조현아 전 칼호텔 사장의 웨딩드레스가 밀반입됐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황이다.
최근엔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억대 명품을 밀수했다는 제보도 나왔다. 즉 조 회장 일가가 대한항공 해외지점과 항공기를 마치 자신들의 '개인 택배' 용도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 제보자들의 주장이다.
조 회장 일가는 어떤 방법으로 세관당국의 눈을 피해 밥 먹듯이 물품을 들여올 수 있었던 것일까.
일각에선 관세청의 묵인이나 도움 없이는 이 같은 장기적, 조직적 밀반입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진그룹 총수 일가를 조사 중인 관세청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밀수 시나리오 1. '여행자 통로'
◆…"철저하게 검사하는 것 같지만..." = 인천공항세관 직원에게 개장검사를 받고 있는 여행자. 세관은 탈세나 테러물품 등의 의심이 되는 가방에 대해선 엑스레이 검사 뿐 아니라 직접 가방을 열어 검사하는 개장검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개장검사율은 전체 입국자의 1%대에 그치고 있어 시스템상 구멍이 뚫려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곤 한다.
공항에 도착한 물품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정식 경로는 2군데다. 보통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여행자 통로'와 공항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상주직원 통로'가 그것이다.
대기업 총수, 고관대작들만 이용하는 'VIP통로'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VIP통로는 항공사에서 의전을 위해 붙인 명칭에 불과하며 관세청 입장에선 VIP도 결국 여행자 통로를 통해 물품이 이동하기 때문에 일반 여행자 통로와 다를 바 없다.
여행자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기타 화물들은 엑스레이를 통해 100% 검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검사의 포커스가 테러물품 등 이른바 위험물품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과세물품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둔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관세청의 설명이다.
관세청 관계자는 "엑스레이 검사를 통해 분명히 명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가방을 직접 열어(개장검사) 검사를 하겠지만, 일반 물품과 명품을 엑스레이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즉 여행자 통로를 통해 '버젓이' 명품을 몰래 들여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신속한 여행자 통관을 위해 실제 개장검사율이 1.7~1.8%에 불과하기 때문에 엑스레이 검사에서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고가의 명품이라도 그대로 통로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 회장 일가가 이런 평범한(?) 방법으로 오랜 기간 동안 명품을 밀반입해 왔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이는 일반인들도 가능한 방법으로, 자칫 상습적인 밀수범으로 세관에 적발되면 가산세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간 안정적인 통로로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수 시나리오 2. '상주직원 통로'
조 회장 일가가 일반 여행자 통로가 아닌 상주직원 통로를 이용해 명품들을 밀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곳곳에서 나온다.
상주직원 통로는 면세점, 항공사, 식당 등 공항에 영업 목적으로 상주하거나 공항공사, 관세청, 법무부 등 공적인 업무수행을 위해 상주하고 있는 직원들이 출국장을 오갈 때 사용하는 통로.
상주직원 통로에는 세관공무원이 따로 근무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 통로에는 공항공사 소속 보안요원들이 근무하고 있는데, 관세청과 맺은 협약을 통해 밀수품도 검사하고는 있지만 이들 또한 주로 테러 위험물품 등을 걸러내기 위한 검색 활동을 벌인다.
관세청에선 조 회장 일가가 대한항공 직원들을 시켜 마치 자신들의 물품인 척 상주직원 통로를 이용해 명품 등을 밀반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자가소비용 개인물품과 공사용 수리자재, 면세점 매장보수 및 설치용품, 상주업체 및 기관의 사무용품, 청소용품, 쓰레기, 쇼핑백 등 서비스용품, 기타 생수 등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물품 등은 신고를 생략할 수 있도록 예외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가능성일 뿐, 상주직원 통로를 통한 밀반입 역시 쉽지 않다는 것이 관세청의 설명.
인천본부세관 관계자는 "가끔 면세점 판매장에서 판매원들이 상주직원들에게 사은품으로 화장품 샘플을 주고 하는데, 그런 샘플 하나도 세관에 통보가 온다"며 "상주직원 통로로 대한항공 직원이 물건을 밀반입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설"이라고 까지 말했다.
밀수 시나리오 3. 혹시 다른 경로?
◆…'여기도 구멍' =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밀수를 하기 위해선 여행자 통로나 상주직원 통로가 아닌 '제3의 경로'를 통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특히 부피가 큰 가구 등은 수입신고를 통해 들여와야 하는데, 정황상 비행기 수리용품으로 허위신고를 하고 대한항공 지정공장을 통해 물품을 반출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두 군데 통로가 아닌 다른 경로로 물품을 들여왔을 가능성은 없을까.
제보에 따르면 대한항공 직원들이 비행기에서 조 회장 일가의 물품을 빼내 세관 검사 없이 바로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공식적인 두 군데 통로 외에 '다른 루트'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세관 관계자는 "두 군데 통로 외에 다른 통로는 없다"며 "나가 봤자 보세구역이고 짐 투입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물품을 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회장 일가가 일반 물품을 '비행기 수리용품'으로 꾸며 허위신고를 했다면 몰래 물품을 반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세청 관계자에 따르면 비행기 수리용품은 비행기 수리용품법의 감면요건에 해당할 경우 관세와 부가가치세가 80% 면제된다. 이 같은 비행기 수리용품은 감면요건을 심사받아야 하기 때문에 100% 서류제출로 신고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내용물을 전수 확인해 일일히 서류와 대조하는 작업은 인력 부족 등 물리적인 부분으로 인해 불가능한 상황. 관세청 관계자는 "비행기 수리용품과 관련해 서류를 모두 받지만 소모품 등 주기적으로 반입되는 품목은 전산을 통해 걸러져 직접 내용물을 확인하는 경우는 사실상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통관이 완료된 수리용품은 바로 공항 내에 있는 '지정공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전했다.
즉 조 회장 일가가 평소 세관 검색 대상에서 제외되는 물품을 알고 이를 악용해 가구나 명품 가방 등을 비행기 수리용품으로 허위신고했다면, 지정공장까지는 세관직원의 검사없이 일사천리로 물품을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지정공장 역시 보세구역이기 때문에 물품을 함부로 반입·반출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항공이 운용하고 있는 지정공장이나 창고는 세관이 아닌 대한항공이 자체적으로 고용한 보세사들이 물품의 반입·반출을 관리하고 확인하기 때문에, 일단 지정공장까지만 물품이 이동하면 충분히 밖으로 물품을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관세청 직원들 사이에선 이미 여행자 통로나 상주직원 통로가 아닌, 비행기 수리용품 수입 과정에서의 허점을 이용해 밀수를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한편 언론보도에 따르면 최근 관세청은 대한항공 직원을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 조 회장 일가가 물품을 어떤 식으로 들여왔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청은 관련 혐의가 확인되는 대로 조 회장 일가도 소환할 방침이다.
관세청은 일반 관세 부과 시효인 5년 동안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조사하고 있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관세를 포탈했을 경우 10년 동안의 카드 내역을 조사할 수 있다고 전했다.
수입 물품가액이 커질 경우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이 적용될 수도 있다.
특가법은 탈루 목적을 갖고 고의적으로 관세를 포탈(사기 및 기타 부정한 방법)하기 위한 밀수의 경우 물품가액이 2억~5억원일 때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5억원 이상인 경우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