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회복이 채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물가비상이 걸렸다. 불과 6개월 전 만해도 세계경제의 걱정꺼리는 디플레이션, 즉 지속적인 물가하락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자산가격이 떨어지고, 너도나도 빚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면서 물가가 다시 떨어지고, 그 결과로 경기가 움츠려드는 이른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었다.
일본은 여태 이 디플레이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고, 미국도 아직까지는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이 더 걱정이다.
금리를 제로가까이 낮춘 것도 모자라 양적완화조치로 9000억 달러를 시장에 추가 공급한 것도 이 디플레공포 때문이었다.
이런 와중에 주요 신흥국들의 물가가 지난해부터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경제가 빨리 성장하면 물가는 어느 정도 오르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그 상승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이 올해 아시아 국가들이 직면할 가장 큰 도전이라고 국제통화기금(IMF)이 걱정할 정도다.
중국은 지난해 은행 지급준비율을 여섯 차례나 올리고, 기준금리도 두 차례 인상하는 등 물가와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다. 그럼에도 작년 1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1%에 달하며 2년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브라질은 지난해 물가상승률이 5.9%로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기준금리를 8.75%에서 10.75%까지 올린데 이어 이번 달에도 재차 금리인상에 나설 태세다.
러시아도 작년 물가상승률이 8.8%로 당초 예상치를 크게 웃돌아 금리인상이 점쳐지고 있고, 인도 역시 8%가 넘는 물가상승세가 이어지면서 작년에만 여섯 차례 금리를 인상했다.
작년 하반기에만 네 차례 금리를 올린 태국 중앙은행은 지난 12일 기준금리를 또 다시 기존 2.00%에서 2.25%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인도네시아는 작년 12월 물가상승률이 6.9%를 기록해 물가안정 목표치를 넘어섰다.
각국 정부들의 정책초점이 위기극복과 경기부양에서 인플레이션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중앙은행들이 속속 금리인상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어찌 예외일수가 있으랴. 이명박 대통령이 연초 "물가와의 전쟁이라는 생각을 갖고 물가억제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내각에 주문한 데 이어 한국은행이 새해 첫 달부터 기준금리를 전격인상하며 물가사수에 나섰다.
그러나 여타 신흥국들에 비해 대응이 너무 늦었다. 한국은행은 올해 연간 물가상승 전망치를 3.7%로 잡았었다. 그러나 올 1분기에만 물가상승률이 4%대에 이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원유 금속광물 농산물 등 각종 원자재 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데다 한파 폭설 구제역 등 악재들이 줄줄이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1분기에 4%대 상승이 현실화 될 경우 2008년 4분기 4.5% 상승 이후 2년 여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게 된다.
신흥국들의 '인플레이션 비상(非常)'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증가에다 세계적인 이상기후로 국제원자재와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글로벌 금융위기극복과 환율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지나치게 돈을 많이 푼 데 있다.
이 돈으로 투자자들이 원유와 면화 같은 원자재에 투자하며 원자재가격을 올리고 신흥국 주식과 채권을 사들이며 경기를 과열시키고 있다. 경기부양을 위해 풀었던 유동성이 인플레이션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세계의 공장'으로 전 세계 물가안정에 기여해왔던 중국이 경제성장과 함께 인플레이션 수출국으로 탈바꿈하면서 세계적 물가불안의 한 요인으로 가세하고 있다.
신흥국들에게 물가급등은 발등의 불이다. 그렇다고 경제성장을 희생시켜가며 물가억제 일변도로 갈 수는 없다는 데 공통의 고민이 있다. 물가억제를 위해 금리를 계속 올릴 경우 경제성장이 억제되고 단기적으로 해외자금이 유입돼 금융시장이 불안해진다.
물가상승의 주요인이 넘치는 국제 유동성과 이로 인한 원자재가 상승 등 '외부'에 있다면 물가대책은 국내대책으로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물가대책은 행정력을 앞세운 물가단속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 원자재 값 상승 등을 빌미로 편승·과다 인상을 일삼는 관행이 없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집중단속 의지 표명은 이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고, 그 자체만으로 시장에 분명한 시그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그널은 시그널로 그쳐야한다.
공공요금 동결과 가격 담합 등 불공정 거래의 집중 감시 등은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시장의 수요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미시적 가격에 까지 정부가 관여해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은 반짝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여러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
원가상승 요인을 무시하고 행정력으로 물가를 누를 경우 언젠가는 '급등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특히 대통령은 큰 방향을 제시하고 물가상승을 불러오는 근원적 요인들을 거시정책적 차원에서 다스리는 데 주력해야한다.
'기름 값이 묘하다'는 식의 대통령 발언은 "값을 내리라는 취지가 아니었다"고 추후 해명이 나왔지만 세금과 환율변동성 등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발언이라는 점에서 대통령이 참모들의 제대로 된 조언을 받고 있는지 의심을 살 정도였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정책대응을 제대로 했더라면 물가불안의 수위를 상당 폭 낮출 수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시장 곳곳에서 나오는 물가불안신호들을 G20(주요20개국) 서울정상회의에 '올인'한 나머지 이를 무시하거나 알지 못했다.
우리의 경제상황이 아직은 신흥국에 가까운 데도 회복이 더딘 선진국과 정책보조를 맞추려다 출구전략 타이밍을 놓치고 인플레이션 압박만 키워 온 것이다.
선제적 대응과 근원적 처방은 않고, 재탕 삼탕 된 내용들을 종합세트 식으로 포장을 달리하며 업계만을 압박하는 대증요법적 물가대책은 권위주의식 관제(官製)물가 시대의 유물이다.
이번 물가상승을 "2008년 초 정부가 'MB(이명박대통령) 물가' 52개를 지정 관리한 것이 곪아 터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석유가격동향에 국민들이 민감한 것을 기화로 정유업계와 주유소를 물가상승 주범처럼 계속 몰아세운다면 이는 책임 떠넘기기이자 또 다른 포퓰리즘이다.
자산인플레이션을 억제시키고, 원자재의 안정적 확보 관리와 함께 유연한 금리 환율 정책 등을 통해 물가상승을 억제하면서 동시에 경제성장세를 유지하는 종합적이고 근원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