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세, 금융거래세, 혹은 금융부담금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세금에 대한 논의는 유럽의 일부국가에서만 제한적인 흔적을 남기고 글로벌화된 이 세상에서 다시 조용히 침잠하고 있다.
금융을 주도하는 국가들은 바젤 III 협약을 통하여 2019년까지 은행들이 자기자본비율을 현재보다 높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2010년 11월에 한국에서 열리는 G20에서 은행세가 의미있는 의제가 되지 못할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짧은 시기동안 주목을 끌었던 논의에서 학자들이나 경제정책수행자들이 은행세에 부여한 정책적 역할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금융위기 과정에 금융기관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회수이다. 이 관점에서는 은행세 도입의 필요성은 우리에게서 보다 미국과 유럽에서 더 심각하다.
다른 역할은 미래에 발생할 개연적 위기에 대비한 예비자금의 확충이다.
다음으로 시스템위기를 초래하여 경제의 전 분야에 부정적인 외부효과를 야기하는 금융기관의 행위를 미시적으로 가려내 교정세로서의 은행세를 부과하는 일이다.
은행세의 경제적 역할에 대하여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금융분야에 집중되는 생산자원의 초과공급 현상을 교정하는 일이다.
국민경제에 유한한 생산자원인 자본과 노동이 한 분야에 적정한 수준보다 초과공급되면 그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생산자원이 부족하고 결과적으로 그 사회의 장기적인 성장에는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Misallocation of Resource).
이상적인 상황에서 생산자원은 가장 높은 보상이 가능한 분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결과적으로 경제의 각 분야 한계생산성이 일치하도록 배분된다.
시장의 힘을 믿는 경제학자들은 정부의 규제가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금융부문과 비금융부문의 균형을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있는 상황으로 본다.
현재의 금융부문의 경제적 역할은 70·80년대와 매우 비교된다.
미국에서 70·80년대에 금융기관 종사자의 부가가치창출 규모는 GDP 대비 5% 수준이었으나 현재 이 비중은 8%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2008년 기준 6.7%에 이르며 금융 및 보험기관 종사자들의 평균 임금은 전산업종사자들의 평균임금의 140%에 이른다.
그러나 금융부문이 전체 경제시스템에 제공하는 전통적인 업무영역은 기업과 가계에 대한 자금조달 및 중개, 보험, 증권거래 등이며 이 기능의 수행은 70·80년와 비교해도 변화가 없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무렵에는 인터넷 회사들의 붐이 조성되고 서비스 분야에서도 컴퓨터의 도움으로 사무자동화가 진행되어 향후 세계에서 금융서비스(Banking)는 존재해도 금융기관(Bank)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됐었다.
전통적인 금융기관의 서비스는 사무자동화를 통하여 훨씬 소수의 인력으로 공급이 가능하므로 금융인력과 금융기관의 대폭적인 축소가 예견되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수년 후 금융위기 직전의 금융기관들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고급두뇌가 모이고, 실적은 높아지고, 연봉도 솟았다. 마치 금융부문에서 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소비자들의 새로운 기호와 이를 충족시켜주는 신상품을 찾아낸 듯이.
이 시기에 금융기관에 새로이 추가되거나 중요성이 커진 업무 영역은 개인 및 법인의 자산관리에 대한 자문과 파생금융상품과 관련한 업무다. 이러한 기능은 GDP에서 차지하는 금융부문의 늘어난 비중에 해당한다.
그러나 금융고객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보다는 결과적으로는, 금융위기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글로벌화된 경제시스템 내에서 거대한 시스템리스크의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증권시장의 모든 시장참여자들이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면 결과적으로 그 때 부터 대폭락이 시작되듯이 금융부문의 이러한 분위기는 비이성적 초과비대 현상의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신호였다고 생각된다.
왜 그러면 금융부문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보다 생산자원이 초과하여 공급되는 것인가?
시장에 영향을 미쳐서 효율적 자원배분을 왜곡시키는 요소는 정부의 규제 이외에도 시장참여자들을 구속하는 인습/관습, 규제외적인 정부의 역할 등 다양한 요소를 들 수 있다.
시장이 가진 힘은 시장기능을 제약하는 이러한 환경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주어진 환경이 경쟁에 공정한 환경이 아니면 시장에서의 결과도 공정하지 못하게 나타나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이를 장기간 감내해내지 못한다.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작동되는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따라서 시장의 힘을 맹신하기 보다는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도록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하며 여기에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에서 시장기능을 제약하는 환경 요인으로 우선 은행의 지배구조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대주주가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 은행의 소유구조에서 은행의 운영자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장치가 부재하고 은행종사자들에게는 다른 직종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보상이 부여된다.
정부의 퇴직관료가 낙하산으로 내려오고 이들이 금융기관에 안착하면서 관이나 정치권의 로비스트로서 구실을 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은행종사자들의 근무환경이 주로 도시지역이라는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부가가치세 측면에서는 금융서비스가 면세라는 점도 금융부문의 특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자금순환의 통로에 서있는 금융기관의 기본적 속성으로서 특혜추구적 동기(Rent Seeking Motivation)가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금융부문의 이상적 비대현상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역사적 형성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에서도 금융권은 정치권의 주요 돈줄 역할을 하며 특히 금융권과 가까웠던 클린턴 행정부 하에서 금융기관의 규제는 대폭 완화되었다. 독일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저축은행들과 이들을 거느리는 주정부 은행들의 감사위원회에는 정치인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금융위기는 글로벌하게 차곡차곡 준비되어 오고 있었다.
금융부문에 모인 생산적인 인력이 자산관리에 대한 자문서비스와 같은 제로섬 게임 성격의 경쟁에 몰리면 그들이 만들어 내는 상품은 결과적으로는 가장 파괴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고객들에게 리스크를 정교하게 호도하는 투자자산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금융부문의 비대화 현상이 어쩌면 은행세가 존재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금융위기는 이 금융부문의 비정상적인 비대현상의 논리적 귀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금융기관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융기관과 관련한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현상은 마찬가지로 존재하며 이는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이 은행세를 도입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이다.
동시에 이는 은행세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과제이며 정부와 국민이 대학교육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하여 해결하여야 하는 과제이다.
대학과 대학원 교육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법학이나 경영 분야를 전공하여 금융기관에 취업하고자 하지 않고 자연계열이나 공학분야의 전공을 기꺼이 택하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금융기관이 우수한 대학 졸업자들이 몰리는 직장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금융위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약력] 독일 Hamburg 대학교 경제학 석/박사,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KPMG 독일 프랑크푸르트 Branch 근무, 계명대학교 경영대학 세무학과 교수, 중부지방국세청 납세지원국장,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세무대학원 교수(現),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위원회 위원장 (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