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언론을 통해 선보였던 애플의 태블릿PC 아이패드(iPad)가 지난 주말부터 공식판매에 들어갔다.
태블릿PC는 평판액자(tablet)모양 기기의 스크린을 손가락이나 펜으로 터치해 조작하는 휴대용PC다. 화면만 키웠을 뿐 아이폰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유보적 평가와 넷북을 대체할 신개념의 PC라는 찬사가 엇갈리고 있지만 발매 첫날에만 70만대 이상이 팔리는 등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사실 태블릿PC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은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은 지난 2001년 "앞으로 5년 내 태블릿PC가 가장 인기 있는 PC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뒷받침하듯 태블릿PC가 속속 시판됐지만 펜 입력 방식의 불편함 등으로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태블릿PC가 다시 주목받는 것은 그 중심에 애플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아이디어라도 애플이 하면 달라진다는 얘기인가.
애플의 혁신시리즈는 2001년 1월 온라인 음악서비스 아이튠즈(iTunes)를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 MP3 플레이어 아이팟(iPod), 2007년 1월 스마트폰 아이폰(iPhone), 2010년 태블릿PC 아이패드에 이르는 거대한 쓰나미를 몰아오고 있다.
아이패드의 구매 열기는 아직 아이팟이나 아이폰에 미치지 못하지만 컴퓨터 이용 역사상 PC 탄생 이래 가장 중대한 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캐주얼 컴퓨팅'(casual computing)시대의 개막이 그 첫번째 의미다.
아이패드는 아이폰이 구축한 콘텐츠 환경을 훨씬 크고 선명한 화면을 통해 제공한다. 게다가 음반은 물론, 영화 등 동영상, 그리고 아이워크를 통한 문서작업, 아이북을 통한 전자책 서비스, 신문 잡지마저 애플의 플랫폼 안으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계속해서 들고 다니기에는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등 휴대성에 문제가 없지 않아 보이지만 '표준 랩탑(laptop) 종말의 시작'인 점은 분명하다.
PC사용이 보다 친숙 · 간편해지고, 키보드로 일일이 명령을 두들기는 번거로움 없이 키패드(key pad)를 터치하는 유유자적함과 세련된 인터페이스는 컴퓨팅의 새 패러다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아이패드 출시가 추후 출시될 것으로 알려진 '애플TV'와 함께 본격적인 3스크린 내지 4스크린의 미디어혁명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들은 이제 TV 따로, 컴퓨터 따로, 휴대폰 따로, 게임기 따로 등 공급자 중심의 콘텐츠 유통환경에 더 이상 순응치 않고 어느 기기에서든 통합된 형태의 사용자환경과 콘텐츠 이용기반을 원하는 추세다.
기술혁신에 맞추어 사용자들의 콘텐츠 소비욕구와 성향도 진화하고, 애플이 바로 이러한 수요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신문과 잡지 등 전통적 미디어들은 아이패드가 콘텐츠 유료화를 선도해 줄 '구세주'역할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바로 아이폰 돌풍에 이은 아이패드 쓰나미다.
애플이 구축한 모바일 SW(소프트웨어) 플랫폼의 쓰나미가 휴대폰을 넘어 TV까지 덮친다면 한국의 휴대폰과 TV제조업체들은 어떻게 될까. 애플과 구글이 TV까지 넘본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굳어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IT강국' 한국은 아이폰쇼크에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 아이패드 쓰나미에도 이렇다 할 대비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아이패드 출시국가 10개국에서 한국은 빠져 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주요 부품 공급업체가 삼성전자, 삼성SDI, LG디스플레이, 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어서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많이 팔리면 덩달아 한국의 부품공급업체들도 그만큼 이익을 보게 돼 있는 현실은 우리로서는 다행이다. 그러나 이는 모래성이나 다름없다.
스마트폰과 테블랫PC 등 모바일기기는 SW플랫폼, 단말기, 네트워크, 애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의 4부분이 한 묶음으로 얽혀 있다. 한국은 단말기(삼성, LG)와 네트워크(와이브로)에서만 경쟁력이 있고 SW플랫폼은 구멍이 뚫려 있다. 애플은 모바일 SW 플랫폼과 하드웨어설계를 주력으로 삼고 기기생산은 외주를, 네트워크는 AT&T를 활용하며 모바일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
모바일 플랫폼이 없는 휴대폰업체들의 운명은 MS와 인텔의 이른바 윈텔 플랫폼에 끌려 다녀야했던 20세기 PC업체들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SW 없이 하드웨어만으로 먹고사는 시대가 끝났음을 스마트폰 등장이 웅변해준다. 여기에다 TV 까지 SW플랫폼 중심으로 재편되면 한국의 제조업경쟁력은 그로키 상태에 빠질 수 있다.
휴대폰을 넘어 TV까지 연결할 수 있는 SW 플랫폼 개발이 절박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니에게서 빼앗은 TV 주도권을 애플이나 구글에 내어줄 수도 있다. 아이패드 쓰나미는 기존의 판을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판을 뒤집어 엎는 위력을 지닌다. 잘 나가던 우리의 글로벌기업 주역들이 하루아침에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SW 경쟁력 부족이 IT제조업의 위기로 이어지면서 대기업들에게 뒤늦게 SW 전문인력 확충 비상이 걸렸다. 국내 SW 산업규모가 워낙 작아 모바일 SW개발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자 대기업들이 SW 관련 인력을 싹쓸이하는 폐단도 빚어진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들이 핵심 SW개발자들을 영입해 가서 진행해오던 제품개발조차 포기해야 할 상황이라고 아우성들이다. 이는 함께 생존하는 모바일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닌, 공멸의 길이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는 디자인을 베끼거나 사용자환경을 비슷하게 만든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모바일생태계를 둘러싼 개발자들과의 수평적 협력관계, 그리고 자생적인 문제해결 구조 자체가 하나의 비즈니스모델이라고 한다. 수직적인 한국비즈니스 관행에서는 통하기가 어렵다. 정부가 나서면 모바일SW플랫폼 경쟁력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2009년 4월 실패로 끝난 위피(WIPI: 한국무선인터넷표준규격)의 불편한 기억을 떠올리며 정부가 나서지 말고 개방형 통신환경을 가로막는 '전봇대'들이나 뽑아달라는 주문이 대세다.
위피의 탑재의무화 4년이 거둔 성과라면 국내통신시장 보호가 고작이다. 국내이동통신시장은 3G(3세대)환경이 조성됐음에도 외국산 단말기가 들어오면 지금도 어떤 이통사를 통해 개통이 가능한지를 확인해 해당 대리점을 찾아가야하고, 이통사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격과 출시여부가 결정되는 등 불편이 따른다.
국내에 기반을 둔 모바일생태계에 안주해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은 뒤늦게 상륙한 아이폰의 파괴력으로도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보다 더 엄청난 쓰나미를 강 건너 불 보듯한 IT강국 한국의 무감각과 무력함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