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총재는 뒷전에서 조용하게 일하는 자리다. 한 나라의 통화가치를 수호하는 보루인 중앙은행을 성전(聖殿)이나 사원(寺院)에 비유하고, 그 총재를 속세의 영향력을 떠나 도를 닦는 수도승에 비유하기도 한다.
금리와 통화정책을 놓고 대통령 말도 잘 듣지 않아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나라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총재가 요즘처럼 국제적으로 각광 받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
뉴스위크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사뮤엘슨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밴 버냉키 의장과 유럽중앙은행(ECB)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 일본은행의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 3명을 글로벌 엘리트 랭킹 4위, 5위, 6위의 '경제 3총사'로 불렀다.
세 사람 다 전문 관료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증내는 과목을 공부했고, 선출직이 아니고 임명되어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일반인에게 잘 이해되지도 않은데도 엄청난 파워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그 파워 때문에 경제가 잘못되면 곧 잘 ‘동네 북’이 된다. 선거철에 금리를 올리면 선거를 망친다고 집권세력에게 몰매를 맞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기 일쑤다. 장고 끝에 금리를 내리면 시장에 굴복했다고 욕을 먹고, 시장 쪽에선 ‘뒷북’을 쳐 효과가 없다며 크게 반기지도 않는다.
툭하면 통화량을 풀었다 죄였다하는 우유부단한 중앙은행총재들을 통화이론의 거장 밀턴 프리드먼은 아주 뜨거운 물과 아주 찬 물을 번갈아 트는 ‘샤워장의 바보’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금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 총재자리는 영광의 자리가 아닌 가시방석이다. 경제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해치지 않으면서 바닥까지 내려가 있는 금리를 복원시켜야 할 과제를 부둥켜 안고 있다.
인플레기대심리와 자산거품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경기를 띄우는 묘방이 어디 말처럼 쉬운가. 통화가치를 지키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견지하려면 인플레는 어느 선까지 용인해야 할 것인가. 어느 하나도 쉽게 답을 찾기 어렵다.
이성태 한국은행총재가 이달 말 임기가 끝나면서 후임 총재 인선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금리인상 등 출구전략 시행과 관련해 이성태총재가 이명박 정부와 각을 세워온 데다, 한은의 중립성과 독립성 문제와 맞물리면서 논란이 증폭되는 양상이다.
후임총재로 김중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사가 내정됐지만 앞으로 정부와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국민적 관심사다.
중앙은행총재의 자질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세 가지로 집약된다. '통화가치의 지킴이'로서의 불굴의 신념과 의지가 첫째다. 국제금융시스템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예리한 국제 감각이 둘째다. 시장과의 원숙한 대화능력이 셋째다.
시장에 대해 '고함'을 치지 않고 '귀엣말'로 속삭여주는 세련된 화법이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자질을 갖춘 총재라야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다.
국내 금융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조사에서 전체의 83%가 한은총재의 자격요건으로 '통화정책 독립성에 대한 의지'를 꼽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정작 임명권자인 청와대는 '독립성에 대한 의지' 대신 '정부와의 소통'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출구전략의 핵심이 금리인상이고, 그 시점이 가장 중요한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정부와의 소통에 강점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정책당국 간의 공조(Coordination)의 필요성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부와의 '소통'이 정책 간 조화 수준을 넘어 통화정책의 주객자체가 바뀌는 모양새가 된다면 이는 큰 문제다. 정책공조는 한은의 독립성이 전제될 때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지수로 볼 때 한국은 여전 하위권이고, 중앙은행 자율성 지수(2007년 IMF 조사연구)도 유럽중앙은행을 1로 할 때 0.56으로 주요 선진그룹 국가 중 일본(0.44) 다음으로 하위권이다.
현행 법률상 한은에는 물가안정기능만 있고 금융안정은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 1997년 말 한은법이 개정되면서 당시 재무부장관이 맡고 있던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자리를 한은총재에게 넘기는 대신 한은 산하에 있던 은행감독원을 떼어내 통합감독권을 신설하면서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라는 금융안정 목적이 빠진 것이다.
글로벌금융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은이 늑장대응을 해 비판을 받는 것도 은행 등 금융회사에 대한 독자적인 감독권과 조사권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한은의 자업자득인 셈이다.
뒤늦게 금융안정 기능을 목적에 포함시키고 금융기관에 대한 제한적 감독조사권을 갖도록 한은법 개정이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금융위원회 및 금융감독원과의 '밥그릇 싸움'이 국회 소관 상임위 간 다툼으로까지 번진 상황에서 한은총재가 바뀌게 된 것이다.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시켜 금융 불안에도 대처할 수 있는 효율적인 중앙은행모델을 정착시키는 일은 정권의 차원을 넘어선다. 일본정부와 자민당이 '정부와의 협조'를 내세워 일본은행총재 후보를 지명했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국회에서 연거푸 부결당하고 세 번째 지명자인 현 시라카와씨가 총재가 된 사례는 무얼 말하는가.
재정과 금융 간의 분리원칙이 흔들리고, 중앙은행이 정부에 협조를 잘 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 반대이유였다. 정책기관들이 자율성을 갖고 상호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질 때 효율적인 공조도 가능하다.
정부와의 '소통' 및 공조체제 강화가 '은근한 금융관치'의 명분으로 악용된다면 이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인상을 시장에 주게 된다. 인플레 기대심리의 재발은 시간문제다.
G20 의장국으로서 국제공조 때문에 한국이 먼저 금리를 올려서는 안된다는 정부의 주장은 너무 고지식하게 들린다. 금리인상은 타이밍이 생명이다. '언제 올리겠다'고 미리 광고할 성질이 못된다.
각국이 출구 쪽으로 이동을 해가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신중하고 유연한 자세'를 계속 강조할 뿐이다. 국제공조 또한 섣불리 올리지는 않겠다는 약속이지 회복속도와 거품 가능성 등 각국의 사정에 따른 차별적 대응마저 못하게 한 것은 아니다.
'소통'에 치중한 나머지 한은총재가 '정부도우미'가 되고, 정부와 중앙은행이 대외적으로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국의 위상과 국격이 높아질까.
밴 버냉키 의장은 합리적 기대와 경제과학으로 경제를 건전궤도로 유도하는 ‘총명한 엔지니어’임을 자처한다. 정치에 휘둘려 반짝했다 망가지는 허풍스런 ‘경제대통령’보다 세계는 ‘위대한 중앙은행가’를 요구하고 있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