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세계적인 경제력 분석기관인 EIU(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트 유닛)가 조사한 한국의 IT(정보기술)산업 경쟁력은 2007년 세계 3위였다.
2008년에 8위로 떨어졌고, 2009년에 다시 16위로 추락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는 호주와 싱가포르 일본 대만에도 뒤지는 5위다.
불과 3년 사이 지난 10년간 쌓아올린 것을 다 까먹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과거 IT강국이라는 명성과 기술력으로 '망한 부자'처럼 버티고 있다고 IT업계는 푸념한다.
인터넷, 쇼핑몰, 미니홈피, 3G휴대폰 등으로 세계적 흐름을 주도하며 세계 최초 개발, 세계 최고 수준, 세계 최대 보급률을 뽐내던 IT강국 한국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마디로 경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하드웨어의 기술적 우위에 안주하며 소프트웨어 육성을 게을리한 업보다.
애플과 구글이 스마트폰 돌풍을 일으키며 모바일 인터넷시장을 주도해 나가자 "이러다 한국은 단순제품공급처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애플과 구글은 독자적인 운영체제(OS)로 휴대전화 단말기과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내놓으며 새로운 먹이사슬(Value Chain)을 형성하고 있다. 서비스, 플랫폼, 제품이 선순환을 이루는 모바일 생태계를 자체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유선 및 이동통신업체가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앉아 휴대단말 유통권한과 네트워크 투자 등으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업체를 호령했지만 이제는 이들 소프트웨어업체가 최상단에 등극하는 모바일 인터넷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아이폰의 국내 도입마저 2년이나 늦었다. '모바일 쇄국'정책에 따른 경쟁부재에다, 높은 이동통신요금으로 무선인터넷시장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고, IT업체들은 모바일시대에 제대로 대비를 못했다. IT산업에서 6개월은 다른 산업의 3년과 같다고 한다.
스마트폰 도입을 계기로 유무선망이 전면 개방되면서 뒤늦게 구글과 애플의 행보를 헐떡거리며 뒤쫓아 가는 처지가 됐다.애플과 구글의 양대 구도로 굳어져 가고 있는 '모바일 생태계'는 앞으로 최소 몇년간 위력을 떨칠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국은 휴대전화, PC, TV 등 각종 IT제품과 부품생산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고 있어 구글과 애플의 구도가 고착되더라도 그 속에서 당분간 버틸 수 있는 여력이 만만치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휴대폰의 경우 삼성전자가 지난해 2억2700만대를 팔아 4조1000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애플은 아이폰 2500만대 판매로 5조원의 이익을 남기는 등 기존 시장질서도 요동치고 있다. 기존의 휴대폰은 '모바일 인터넷 기기'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다.
게다가 소프트웨어 시장규모는 반도체의 4배로 추정된다. 소프트웨어 확충으로 모바일인터넷 소비대중을 잡지 못하면 IT기기 제조사는 단순한 조립공장으로, 이동통신업체는 전력과 가스회사 같은 평범한 유틸리티 회사로 전락할 위험성도 다분하다.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스마트폰으로 마감한다'는 모바일 인터넷 대중화시대가 열리면서 이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모맹'이란 유행어도 등장했다. 한국은 지금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유선 인터넷 강국'이었다.
그러나 무선, 즉 모바일 인터넷에 대한 산업계와 정부당국의 준비부족과 대응 잘못으로 이 '반쪽'강국의 입지마저 위협받고 있다. 무선 인프라 구축을 선도하고, 취약부문인 소프트웨어·콘텐츠·애플리케이션 역량을 대폭 강화해 유무선 IT강국으로 재도약을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정부의 명확한 비전과 지원, 기업의 혁신, 시장의 역동성 등 3박자가 선순환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IT강국의 추락은 이명박 정부에도 큰 책임이 있다. 이른바 '뉴 IT'를 표방하며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를 해체하고 IT 관련분야를 여러 부처로 분산시킨 것이다. 다른 산업에 접목시켜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취지였지만 IT산업의 첨단성과 진화의 특성을 무시한 채 하위산업으로 격하시킨 결과가 됐다.
잘 만든 3D 영화 한 편이 대형 굴뚝산업의 매출을 능가하는 세상이다. IT산업 국가경쟁력 순위의 경우 비즈니스 환경과 IT산업 지원체제에서 한국의 순위는 톱 20위 바깥으로 밀려났다.
IT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려면 정부의 연구개발과 정보통신 장비제조업, 그리고 서비스업이 맞물려 선순환구조를 이루어야 하는데 현 정부는 IT산업의 가치사슬을 움직일 수 있는 조직체계와 예산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뒤늦게 IT특보를 신설하고, '더 큰 대한민국은 소프트웨어로'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컨트롤 타워 부재는 계속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모바일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내 기업들이 가야할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삼성전자가 자체 모바일용 OS인 '바다'를 내세워 글로벌 플랫폼 구축에 나섰지만 애플과 구글의 벽을 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각 이동통신사의 애플리케이션 마켓의 가입자와 콘텐츠 또한 꾸준히 늘고는 있지만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안드로이드마켓 등에 대항하기에는 그야말로 구멍가게 수준이다.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만들어야 기기도 잘 팔린다는 것이 아이폰 성공의 메시지다. 인터넷강국이라지만 정작 한국의 IT인프라는 세계 20위권이다. 우선 인터넷 인프라의 장비들이 대부분 외국산이다.
인터넷과 결합시킬 콘텐츠가 빈약하고, 인터넷 사용시간은 세계 최고라지만 채팅과 음란물 동영상 교환에 몰두하는 등 이용행태가 창조보다는 소비에 편중되고 있다. 잦은 해킹으로 정보보안 문제가 심각해지고, '소프트웨어는 공짜'라는 인식 때문에 불법복제가 만연하고 있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환경,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정책과 제도도 요원하다. 이런 환경과 여건 아래서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와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IT종사자들의 푸념이 IT한국의 현주소를 웅변하고도 남는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