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관행을 바꾸는 일입니다. 정부가 가산세까지 물리면서 독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기업들이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 만난 한 기업체 세무담당자는 내년 1월1일부터 시행되는 전자세금계산서 제도에 대한 불만을 한 웅큼 쏟아냈다. 술병이 한 두 병씩 늘어날수록 불만의 강도는 점차 더해졌다.
불만의 요지는 전자세금계산서 제도 시행과 관련한 정부의 정책 스탠스가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실무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가 기업의 현실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고, 너무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어 답답하다는 것이다.
최근 한 세무법인이 주최한 고객간담회에서도 납세자들의 불만은 터져 나왔다. 이 날 한 납세자는 "납세자들의 입장에서 비용과 불편이 따르는 제도다. 국세청의 행정편의에만 치우친 제도"라고 꼬집었다.
이 정도면 심각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행은 코앞인데 납세자들의 불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지금 하지 않고 수 년 후에 시행한다해도 그 때가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할 것"이라며 한 발짝도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새로운 조세제도가 도입될 경우 납세자의 편의를 우선해야 한다는 기본전제는 유독 전자세금계산서 제도 도입 과정에서는 배제된 모습이다.
정부가 '자료상' 세력들에 의해 유통질서가 무너지고 탈세가 만연하는 현실을 뜯어고치겠다는 대전제에만 치중한 나머지, 납세자 편의는 무시된 것 같아 안타깝다.
전자세금계산서 제도가 도입되면 분명 기존 자료상의 활동범위가 위축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는 행정기관의 편의에 따른 생각, 국세청의 청사진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다수 조세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틈만 나면 고개를 비집고 나오는 자료상의 대부분이 법인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국세청의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인은 사업자등록을 내야한다. 사업자등록을 낼 때는 반드시 국세청의 확인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국세청이 사전에 확인을 거쳐 믿고 사업자등록을 내준 이들이 알고 보니 자료상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전자적인 방식으로 세금계산서를 수수하도록 한다고 해서 자료상이 발붙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라는 것이다.
수요가 있다면 자료상은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업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전자세금계산서 제도에 '최적화'된 신종 자료상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전망이 현실이 된다면?
정부가 전자세금계산서 제도를 도입하려한 가장 큰 목적이 상실된다. 반면 단기적으로 납세자들의 불편과 비용만 늘어나게끔 만들 가능성이 높다.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소수를 잡기 위해 선량한 다수를 희생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의무적 적용을 선택적 적용(임의화)으로 전환하거나 가산세(미교부, 미전송) 부담을 폐지하는 등 편의에 따라 제도권 포함여부를 결정하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기업의 목소리를 지금이라도 정부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은 전자세금계산서의 편리성에 대해 인정을 한다.
중장기적으로 기업의 납세협력비용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투명사회 조성에 기업이 앞장서기 위해 전자세금계산서 문화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다만 당장은 어렵다고 하소연을 한다.
최소한 1, 2년 충분한 적응기간을 주고 자연스럽게 정부 정책에 따라오도록 유인하는 정책 운용의 묘를 정부가 살리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시행일이 코앞인데 지금 와서 '임의화'로 전환하거나 가산세 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경우 이미 세팅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빽도'를 외친다면 정부의 정책 신뢰성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전자세금계산서 제도 임의화 등을 골자로 한 법률개정안(민주당 백재현 의원 대표발의)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납세자의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는 국회의원들의 주장에 대해 정부는 "제도시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교부의무를 임의화하는 경우 사업자의 혼란이 가중될 우려가 있다"고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은 기업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많은 수의 기업들은 전자세금계산서 제도가 도입된 이후의 혼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사업자의 혼란', 정부가 지칭하는 사업자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지난 해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선언하며 친기업 정책을 표방하던 정부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2009년 겨울, 대한민국에는 기업의 목소리는 제쳐두고 자신의 논리에만 함몰돼 고집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정부의 모습만 남아 안타까울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