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격적인 대선 모드에 돌입한 정치권에서 대권을 잡기 위한 이슈 선점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지난 10일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한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해 여·야 대권 주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벌규제로 상징되는 '경제민주화'를 이번 대선과 관련한 최대 정책 이슈로 내거는 모양새다.
그동안 대기업과 일부 재벌들에게 편중된 '부'(富)를 어려움을 겪는 일반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드러난 경제민주화의 골자. 아직까지는 다분히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측면이 많으며, '경제성장' 보다는 '분배'에 포커스가 맞춰진 분위기다.
여기에 정치권은 대기업과 재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복지재원을 확충하는 것만큼 간편하면서도 명분이 서는 방법은 없다고 보기 때문인지, 경제민주화를 위한 대대적인 조세제도 개편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부터 새누리당에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 당했던 민주통합당이 대권을 향한 반격을 노리며, 잠시 접어뒀던 '재벌세' 카드를 최근 들어 다시 꺼내든 이유다.
◆ 재벌세, 경제민주화 첨병?…민주당 "재벌특권 없앤다"
최근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민주통합당은 지난 9일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한 9개 법률 개정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민주통합당의 경제민주화 법안은 경제력 집중완화, 불공정행위 엄단, 금산분리 강화 등으로 재벌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및 서민들을 보호하는 방안이 주요 내용.
특히 지난 4·11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던 '재벌세' 관련 법인세법 개정안이 경제민주화 실현방안에 포함되면서, 잠잠했던 재벌세 논란이 다시 수면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지난 총선에서도 재벌세를 필두로 재벌개혁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마치 재벌들에게만 과세되는 별도의 세금이 도입되는 것 아니냐는 오해가 불거지자 재벌세 용어 자체를 폐기하며 논란을 종식시켰다.
이번에 민주통합당이 발표한 법인세법 개정안은 대기업과 자회사(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사이의 주식 배당금을 법인세 과세대상에 포함시키고, 상호 출자를 위해 금융기관에서 대출 받은 자금의 이자를 세법상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즉 재벌세는 자회사 주식을 보유하려는 대기업들과 재벌 총수 일가에게 현재보다 세부담을 늘리겠다는 법인세 강화 대책인 셈이다.
민주통합당은 재벌세에 더해 현재 3억원 초과로 설정된 소득세법 최고세율 과표구간을 1억5000만원으로 조정하고, 연간 총급여 1억원을 초과하는 고소득자들의 근로소득공제율을 대폭 축소하는 '부자증세' 법안도 내놓았다.
재벌세와 부자증세로 대표되는 이번 9개 법률 개정안 발표로 민주통합당은 그동안 새누리당에 빼앗겼던 경제민주화 이슈를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또한 이번 개정안에 포함되지 않은 일부 조세정의 실현 관련 법안들을 마련해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며, 여기엔 재벌개혁을 위한 세제개선 방안이 더 추가될 전망이다.
그동안 하도급 거래 공정화, 중소 유통업체 상생발전, 비정규직 차별 개선 등 동반성장에 경제민주화의 초점을 맞췄던 새누리당도 재벌세 등 조세개혁과 관련된 입장을 발표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앞으로 갈수록 치열해질 여·야의 대권 경쟁에서 재벌세를 비롯한 세금 이슈가 경제민주화의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 계속되는 경기침체, "재벌세 시기 적절한가?"
민주통합당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 재벌세 논란이 가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재벌개혁의 시기가 다소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2008년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최근 장기화되고 있는 유로존 재정위기의 여파로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치권의 재벌개혁이 무차별적인 '재벌 때리기'로 변질될 경우 기업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이다.
정지선 서울시립대학교 세무학과 교수는 "단순히 재벌이라는 이유로 세금을 과세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경기가 지속적으로 좋지 못한 상황에서 기업들의 세부담을 늘리는 방안은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달 정부가 '2012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며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3.7%에서 3.3%로 하향 조정하는 등 하반기 경제상황은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국내 굴지 대기업들의 영업실적이 곤두박질 치고 있는 점도 큰 문제다.
올해 상반기 국내 주요 대기업의 영업이익은 12조50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한 삼성전자 등 일부 업체를 제외할 경우 지난해보다 줄어들 전망이다.
상장기업분석 전문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10대 그룹 가운데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을 제외한 SK, 포스코, GS, 현대중공업, 롯데, 한화, 한진 등 7개 그룹의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감소할 것으로 분석됐다.
이처럼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자 기업들은 재벌세 과세에 반대함은 물론, 현행 22%인 법인세 최고세율을 20%로 인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등 주요 경제단체들은 최근 정부에 '2012년 세제개선과제 건의사항'을 제출하고, 법인세율 인하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경기활성화를 하반기 주요 경제정책 목표로 설정한 정부도 재벌세를 비롯해 대기업의 세부담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발표시 "전 세계 각 국의 동향을 봐도 다른 세목에서 재원을 늘리는 방안은 강구하고 있지만 법인세를 올리는 나라는 거의 없다"며 "법인세율 인상, 재벌세 신설 등 법인세제 자체를 강화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특히 박 장관은 "우리나라 법인세가 GDP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OECD 회원국 가운데 4위로 실효세율 높다"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법인세를 강화해서 부담을 높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어서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