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비리가 가히 막장드라마 경지에 이르렀다.
퇴출 저축은행의 오너회장이 회사 돈 200억 원을 빼내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혔는가 하면, 대출금을 빼돌려 개인리조트와 가족명의로 서울 강남에 아파트를 사들였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와 9월, 그리고 이번 3차 등 세 차례 저축은행 구조조정과정에서 대주주의 횡령사례가 드러나긴 했지만 직접 공금을 찾아 외국으로 밀항 도주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금자가 맡겨놓은 돈을 은행 대주주회장이 빼내 달아나다니 이를 '은행'이라고 할 수 없다. 대출보증금을 갚지 않은 신용불량자가 버젓이 대주주 노릇을 하고 있어도 이를 모르고 있었다니 '금융감독당국'이라고도 할 수 없다.
빚더미에 앉아 퇴출위기에 몰려있으면서도 사업전망이 불확실한 종합편성채널(종편)에 수십억원 넘게 투자하는 무리수도 저질렀다. 해당 언론사의 압박에 따른 '보험용'이라거나 '울며 겨자 먹기'라는 뒷말들도 꼬리를 문다.
부실을 초래한 대주주와 경영진에 검찰수사의 초점이 맞춰지고, 대주주들이 은행돈을 사금고처럼 사용하는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가 필연적으로 뒤따른 다는 점에서 '저축은행 게이트'를 예고한다.
특히 퇴출된 저축은행의 대주주들이 M&A(합병인수)를 통한 급성장 과정에서 정·관계와 금융계에 '마당발 인맥'을 갖고 있는데다, 영업정지를 앞두고 공개적으로 반발했다는 점도 예사롭지가 않다.
솔로몬·한국·미래·한주 등 4개 저축은행에 대한 영업정지 조치로 1년여에 걸친 저축은행 구조조정은 일단락됐다고 한다. 무더기로 저축은행의 셔트를 내리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정부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상시 구조조정체계'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정기적으로 저축은행검사를 통해 자본적정성과 재무상태 등을 점검해 문제가 있으면 자본증자를 권유하고, 자구노력이 실패할 경우 수시로 구조조정 절차를 밟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축은행의 '무더기퇴출 끝'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축은행의 업황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아 퇴출행진은 이어질 것으로 금융권은 전망한다.
저축은행은 무엇보다 금융기관의 생명인 신뢰를 잃어버렸다. '돈을 맡기면 망하기 십상'이라는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금융당국의 평가 잣대 또한 일관적이지 않다고 업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처지다.
영업정지된 저축은행 계열사들도 예금자들의 예금인출사태로 유동성이 부족해 추가 영업정지될 우려도 적지 않고, 적기시정조치가 유예된 나머지 2곳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3차 저축은행 영업정지는 이번에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과 자기자본이 잠식될 정도의 영업부실이 화근이 됐다. 지난해 1월 이후 구조조정으로 영업정지된 저축은행이 20개에 달하고, 1위인 솔로몬을 포함해 업계 1〜5위 대형저축은행이 문을 닫게 된 것은 충격이다.
그만큼 부실이 저축은행 전반의 문제라는 얘기다. 더구나 솔로몬은 부동산PF대출을 수익모델로 업계 최초로 개발한 장본인이다. PF대출로 몸집을 불렸다가 부동산경기 침체로 부실의 부메랑을 맞은 것이다.
담보로 잡은 부동산가치가 급락하고 부도나는 시행사가 속출하면서 대출자산이 반토막 나거나 심한 경우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이들 4개 저축은행은 자기자본(BIS) 비율 1% 미만 또는 자본잠식 상태인데도 '증액대출'과 '돌려막기 대출' 등 편법으로 부실대출을 숨겨왔다.
이자를 받지 못하는 대출을 부실대출로 처리하지 않고 이자만큼 더 빌려주어 정상대출로 둔갑시키고, 제 3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으로 기존대출자의 대출을 갚게 하는 식의 대출 분식행위가 만연했다고 한다.
이들 4곳은 45일 이내에 유상증자나 자산매각으로 BIS비율을 5% 이상으로 올리지 못하면 제3자에 매각되거나 정부 산하 예금보험공사에 편입되게 된다.
작년에 저축은행 16곳이 문을 닫은 후 5000만원이 넘는 예금을 맡겼거나 후순위채권을 샀던 3만2535명이 원리금 모두를 돌려받지 못했다. 이번에도 예금액이 5000만원을 초과한 8203명이 예금자보호혜택을 받지 못하고, 후순위채 보유자 7200명도 피해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저축은행의 부실을 메우느라 1,2차 구조조정에만 15조7000억원, 이번에 6조원이 추가로 들어갈 것으로 추산된다. 22조원에 육박한 구조조정자금, 그 뒷감당은 사실상 일반국민 몫이다.
저축은행들이 부동산PF 덫에 갇히게 된 데는 한국적 비리(非理)가 합작을 했다. 서민금융기관인 상호신용금고를 상호은행으로, 다시 '상호'를 떼 내어 저축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토록 허용한 우리당국과 정치권에 그 첫 번째 책임이 있다.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한답시고 부실은행을 다른 우량저축은행이 인수토록 몸집불리기를 허용해온 M&A 정책이 두 번째 화근이다. 금융당국에게는 손쉬운 선택이었고, 저축은행으로서는 부실은행인수를 통해 영업권역과 지점을 확대하는 합법적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팔을 비틀어서 인수를 강요당했다는 업계의 주장과 매각절차만 안내했을 뿐 강제는 없었다는 당국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고정이하(연체3개월이상) 여신비율 8%이하, BIS비율 8%이상인 저축은행을 우량은행으로 규정해 '88클럽'으로 명명하고 대출완화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한 우대조치가 세 번째다.
수익성 높은 부동산PF 대출에 저축은행들이 뛰어들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다. PF대출의 위험성을 제 때 경고하지 못한 금융당국의 책임 또한 결코 가볍지가 않다.
이제 공은 금융당국에서 검찰로 넘어갔다. 수사 초점은 저축은행 부실을 초래한 대주주와 경영진 비리에 우선적으로 맞춰질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권과 금융권의 관심은 벌써부터 정·관계 로비 의혹에 쏠리고 있다.
부산저축은행과 제일저축은행 수사에서 밝혀졌듯이 대형 저축은행들은 퇴출을 막기 위해 거의 예외 없이 정치권과 금융당국에 필사적으로 줄을 댔다.
브로커를 고용해 돈을 건네는가 하면, 오너가 친분 있는 인사에게 직접 금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정치인과 감사원, 금융감독원, 국세청, 회계법인, 경찰 그리고 대통령 친인척까지, 로비 대상도 다양했다.
대주주와 경영진의 줄 소환이 이어지면서 위기의 배후에 도사린 한국적 비리의 실체가 과연 얼마나 드러날지 금융 막장드라마의 귀추가 주목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