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와 범야권의 박원순 후보 간 대결로 치러지게 됐다.
말이 보궐선거이지 이 땅의 정치지형(地形)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운명의 한판'이 될 소지도 다분하다.
내년 총선·대선으로 가는 길목에서 여야의 승패가 어떻게 갈릴 지, 시민사회진영의 정치적 실험이 과연 성공할 지 등 흥미를 끄는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촉발된 보선인데다 사회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복지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무상급식 문제를 놓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은 전면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자고 고집했다.
주민투표에서 25.7%의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와 지지를 보였지만 한나라당 패배로 오 시장이 스스로 물러난 마당에 '하위 50% 지원'으로 보궐선거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민주당의 전면무상급식을 수용할 수도 없다. '선택적 복지'를 강조하며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총력 지원했던 과거를 스스로 부정할 경우 전통적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을 맞을 우려 또한 적지 않다.
나경원 후보 역시 "복지는 확대해야 하지만 무상복지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복지당론'을 서둘러 확정해 선거전에 임해야 하지만 문제는 '박근혜 복지'와의 조율이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박근혜 전 대표의 적극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게 당 내외의 분위기다.
박 전 대표는 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된 직후 서울시장 보선 지원 가능성에 대해 "복지에 대한 당의 방향, 정책이 재정립돼 당론이 정리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에 박 전 대표는 처음부터 부정적이었고 "재정자립도 1위인 서울시가 주민투표까지 하면서 반대할 사안은 아니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었다.
복지 확대는 박 전대표가 남북문제와 더불어 가장 많이 공을 들여온 분야이자 대선의 핵심 전략으로 알려져 있다.
당의 복지TF팀은 박 전 대표의 생애맞춤형복지를 기본방향으로 설정하고 무상급식의 경우 '지자체 사정에 따라 확대한다'는 원칙만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복지TF팀이 곧 보고서를 최고위원회에 제출하고, 최고위가 이를 수용할 경우 무상복지의 선거쟁점화를 피하면서 박근혜 전 대표에게는 지원 명분을 준다는 임기응변이다.
중도층 공략보다, 보수층 결집에 무게가 실린 선거 전략 같아 보인다.
그러나 '박근혜복지'는 서울시장 보선의 차원을 넘어서는 국가적 이슈다. 전면 무상급식은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미 실시되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생애주기형 맞춤형 복지'는 출생·보육·교육·취업·결혼·육아·노후·사망,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각 생애 단계별 필요에 따른 맞춤형 복지다. 일자리 창출을 통한 완전고용, 자급 및 생산과 연계된 복지며 시혜적·구제적 복지는 최소화가 그 기본이다.
'퍼주기 식' 무상복지, 또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며 복지를 폄훼하는 우파들의 '복지망국론'과도 엄연히 구분된다고 한다.
범야권 박원순 후보측은 복지와 관련, "무상급식은 당연하고 아동, 주부, 청년, 노인문제나 일자리와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전시성 토건예산을 대폭 줄이고 복지를 위한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고 이미 포문을 열었다.
이에 맞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도 취약계층 보호, 일자리 창출, 육아·보육·교육 정책 등 다양한 복지 콘텐츠를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하겠다며 '무상복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발의한 사회보장기본법을 한나라당 당론으로까지 채택하지는 못한다 해도 '박근혜 복지'의 상당 부분을 수용해야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당의 복지정책을 '박근혜 코드'에 맞춰 가는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는 있지만 친박계 일각에서는 '박근혜 역할론'을 자꾸 강조함으로써 앞으로 서울시장 보선결과의 책임을 박 전 대표쪽으로 몰려고 하는 기류도 있는 것 같다고 경계하는 눈치다.
'복지대전'을 치르면서 복지천국 대(對) 복지망국의 이분법을 극복하는 국가복지의 새로운 틀이 마련될 수 있을지가 이번 보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임은 분명하다.
사상 초유의 정당-시민후보 일대일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보선이 띤 정치적 의미는 각별하다. 시민들의 '정치혐오증' 속에서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시민후보가 거대 정당의 후보와 대적하는 모양새다.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바람'이 제1 야당의 '조직'을 꺾었다. 광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해 자존심이 상한 민주당에는 후폭풍이 거세질 전망이다.
당내에서는 당 후보를 내지 못한 데 따른 책임론이, 당 밖에서는 기존 정치권 밖 인물의 대선후보 추대론이 힘을 얻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손학규 대표의 사의 표명과 함께 이번 보선이 야권대통합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이번 보선이 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서울시민의 절반 이상이 이에 공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전해진다. 최근 꼬리를 물고 있는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이 선거판을 움직일 지 여부도 관심사다.
박원순 후보도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으로 이어지는 토건위주의 서울시정을 끝내는 것을 정권 심판의 방법론으로 이미 제시한 터다. 선거 결과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말 국정 운영이 순탄치 않음을 시사한다.
지방선거에 이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도 패배 위기감을 느낀 보수층이 얼마나 결집할지, 이에 맞서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끼면서 일기 시작한 탈정치의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어 닥칠지가 주요 관전 포인트다.
나경원-박원순 두 후보 모두 혹독한 검증이 예고돼 있다. 한나라당은 안철수 바람을 타고 급부상한 박원순 후보가 그동안 정치권 밖에 있어 왔다는 점에서 서울시장으로서의 도덕성과 자질, 정책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하는 사실상 청문회를 벼르고 있다.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 또한 '콘텐츠가 부족한 이미지 정치인'의 비판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인구 1000만 명, 예산 20조 원을 다루는 수도 서울의 수장을 맡기에는 행정경험과 경력이 너무 모자라고, 이명박∙고건∙조순 전 서울시장 등보다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들이다.
'복지대전'에 박근혜 역할론, 정권심판에 보수층 결집과 야권 대통합, 여기에 혹독한 후보검증까지 맞물리면서 10․26 서울시장보궐선거는 이래저래 판을 키워 가고 있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