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재정위기가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될 것인가.
위기국면이 오고 있다는 경고들이 쏟아지고, 시장이 과민반응하면서 금융위기로 이미 전이(轉移)됐다는 진단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아직은 '솥뚜껑 보고 화들짝 놀라는' 단계이고 위기의 기폭제인 '자라'의 출현 여부는 앞으로 몇 주(週)가 중대 고비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 해결에 주어진 시간은 6주 정도, 재정위기가 통제불능 상태에 빠지기 전에 해법을 찾아야 한다. 시장은 이미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를 기정사실화하고 디폴트 이후를 예상하며 선행(先行)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디폴트의 현실화 여부는 구제금융 트로이카,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80억 유로의 구제금융 6차분을 받느냐에 달려 있다.
트로이카 실사단은 이번 주 아테네를 방문해 공기업 민영화와 긴축조치를 압박한다. 그리스 정부가 올 연말까지 주요 공기업들을 민영화해 500억 유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서둘러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추가 구제금융은 이 트로이카 실사단의 실사와 보고 여하에 달려 있다. 뿐만 아니라 위기의 전염을 막는 방화벽 구축을 위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대폭 확대도 필수적이다. 기금확대를 위해서는 10월 말까지 유로화 사용 17개국 중 구제금융 대상인 그리스와 포르투갈, 아일랜드 3국을 제외한 14개국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지난주 워싱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서 '질서 있는 그리스 디폴트'와 관련한 '3각 그랜드 플랜'이 본격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각국 간 조율과 협의로 그리스 부채 중 일부만 디폴트를 허용해 탕감시키고, 은행 부문에 대대적인 구제금융을 투입하며, 유로존재정안정기금을 현재의 4400억 유로에서 2조 유로로 5배 가까이 대폭 확장하는 플랜이다.
G20은 오는 11월 4일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서 이 계획안을 마무리 지을 목표를 세우고 의견 조율을 위해 재무장관들이 10월 중순 다시 만날 예정이다. 이 모든 해법의 성사 여부는 유로존 국가들 간의 신속한 협력 공조와 단호한 행동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유로존 국가들은 국가 간 이해관계 때문에 해결책 찾기를 미루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정치적 리더십과 국제 공조로 비교적 빨리 극복된 반면 이번 유로존 재정위기는 정치 리더십의 실종으로 문제를 악화시켜 온 정반대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많은 국가가 내년에 선거를 앞두고 있어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들 표를 의식해 재정 긴축 등 인기 없는 정책추진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비용지불이 있지만 장기적으로 국제공조와 긴축재정이 경제회복과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며 국민들을 설득하는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유로존 위기 해결에는 특히 최대 채권국 독일의 책임있는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독교민주당(기민당)은 올해 열린 7개 주의회 선거에서 모두 패배한 데다 기민당과 연정을 구성한 자유민주당은 7개 주 중 5개 주에서 원외 정당으로 밀려났다. 이 때문에 메르켈 총리는 유럽재정안정기금 확대에도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 왔다.
이런 과정에서 세계 금융시스템은 지난 2008년 이후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스스로 유럽과 미국의 정치·재정 혼란이 전 세계 금융시스템을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만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글로벌 금융안정 보고서'에서 지적할 정도다.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미국과 유럽·일본의 경제적 위기가 다른 경제권을 위협해 신흥국 주식시장에서도 급격한 자본흐름 감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선진국들은 자체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에 나서 위기전이를 막아야 한다"고 각국 지도자에게 촉구했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유럽의 은행들과 미국 3대 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을 줄줄이 강등하고, 미국이 내놓은 경기부양책(오퍼레이션 트위스트, 장·단기채 교체)에 대한 실망이 겹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연일 출렁이고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과 글로벌 경기에 대한 불확실성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리먼사태 같은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그리스의 국가부도 및 유로존 탈퇴 가능성은 몰론 배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옛 드라크마를 사용할 경우 빚 부담이 2배로 늘어나는 등 전체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커 디폴트 사태를 맞더라도 유로존에 잔존할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리스를 국가 부도 처리하면 아일랜드와 포르투갈로 위기가 전이되고, 스페인과 이탈리아도 위험해지는 등 겉잡을 수 없는 악몽의 시나리오로 빠져든다. 위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주요국들의 공조를 믿는 길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대응이다.
미국의 경기 침체와 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한국 금융시장의 주요 지표들이 일제히 악화되면서 2008년 리먼브러더스사태의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치솟고,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프리미엄은 2년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리먼사태 이후 설치됐던 청와대의 '비상경제상황실'도 부랴부랴 부활됐다. 위기가 불거진 유럽과 미국보다 한국 시장이 더 벌벌 떠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대외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국경제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우선 유럽계 자금 이탈에 대비해 외화 유동성을 착실히 확보하고 기업 또한 세계 수요 급감에 대비해 위기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 유비무환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과민반응이나 패닉은 금물이다. 펀더멘털 하나하나를 예의 점검하며 위험을 최소화하는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
한국은 대외 채무가 많기는 하나 여전히 순채권국이고, 재정상태도 선진국들에 비해 양호하다. 최악의 상황 때 돈을 풀 여유는 있지만 가계부채 리스크와 복지지출이 아킬레스건이다.
대외채무 가운데 1년 내 만기를 맞는 단기채무(외채)는 37.6%로 2008년 9월의 51.9%에서 크게 낮아졌다. 외채의 상당 부분은 수출을 위해 불가피한 것들이고, 수출만 잘되면 갚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세계수요 격감으로 경상수지가 나빠지면 빚 독촉을 당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는 점이 문제다.
외환보유고는 8월 기준 3121억 9000만 달러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증권투자 자금규모는 5261억 달러, 이중 위기의 진원지인 유럽계 자금이 30%에 육박한다. 국가 디폴트를 막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지만 금융시장의 급변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점이 불안 요인이다.
글로벌 금융 불안 때문에 세계 투자자들이 안전 자산인 달러매수에 앞다투어 나서는 상황에서 달러강세를 시장개입을 통해 막으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외부충격에 대한 우리 경제의 완충장치는 하나같이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방심도 패닉도 아닌, 항심(恒心)으로 경제의 기초체력과 강인한 체질을 부단히 다져 나가야 한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