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황새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두고 얘기들이 많다. 양극화니, 불공정한 거래관행이니, 상생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에 제기되는 문제는 수없이 많다. 해묵은 숙제다.

국가적으로도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여러 차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 발전 양상에 우려를 표시한 적이 있고, 대통령이 공언한 '공정한 사회'가 화두이기도 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문제를 공정의 잣대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많은 문제들이 시장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들이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부 정책이 때로는 의도와는 달리 대기업에만 유리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선의로 추진한, 좋은 정책도 때로 그렇게 될 수 있다.

라 퐁텐의 우화 '여우와 황새' 이야기로 각색해 보자.

옛날 옛적에, 백수의 왕 사자가 뭇 짐승들을 잔치에 초대했다. 사자는 맛있는 고기스프를 끓여 멋진 은쟁반에 담아 내 놓았다. 잔치에 온 여우는 맛있게 먹었지만 황새는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좁고 긴 부리를 가진 황새가 납작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잔치 내내 황새는 한입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이 우화의 의미는 사자(정부)가 접시에 담은 고기스프(정책)는 여우(대기업)에게는 성찬이었겠지만 황새(중소기업)에게는 의도적이지 않았더라도 '그림의 떡'이었다는 것이다.

한-페루간 FTA 체결로 다시 많은 관심이 쏠리는 자유무역협정(FTA)에서도 이런 현상이 목격된다.

정부는 자유무역협정을 확대해 교역상품의 관세장벽을 완화시킴으로써 무역을 확대해간다는 것을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16개 국가와 발효가 되었지만 곧 발효될 한-EU FTA와 한-미 FTA는 그 대상이 초 거대시장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막대할 것이다.

FTA의 확대는 분명 대다수 무역업체에, 특히 수출업체에 무역을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FTA에 의한 특혜관세를 적용받고 수출하려면 수출기업이 당해 물품의 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입증하려면 수출물품을 생산하는데 소요된 원재료와 완제품에 대한 원산지정보를 취합·관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인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또 원산지판정과 관련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인력도 확보되어야 하고, 원산지증명서를 입수하기 위해 다른 기업의 협조를 받아야 할 때도 있다.

원산지를 입증할 채비를 갖추어 놓지 않으면 아예 특혜관세 적용을 못 받을 수도 있고, 적용받는다 하더라도 나중에 수입국 세관의 검증에 적발되어 해당 특혜관세를 추징당하고 처벌까지 받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

FTA 경험이 상당한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런 사례가 종종 일어나고 있는데, 해당 기업들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받아 심각한 경영난을 겪기도 한다.

FTA를 활용하려는 대기업은 마음만 먹으면 큰 어려움 없이 전산시스템이나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 다른 중소기업들(주로 대기업에 납품하는)의 협조도 물론 쉽게 받을 수 있다.

최근 관세청으로부터 '원산지인증수출자' 자격을 받은 삼성전자는 이번 인증을 받기 위해 지난 2009년 하반기부터 임원 1명을 포함한 12명으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원산지검증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모두 글로벌기업인 삼성전자만큼의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준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인력확보나 다른 기업의 협력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중소기업들은 대개 속수무책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FTA 협정국 시장에서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수 있다.

FTA 활용 뿐만이 아니라 유사한 사례는 도처에 수없이 많다. 어떤 정책에 대해 중소기업이 부응하기 어려운 것은 대개 그 정책수혜에 비용부담이 크거나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한 경우다. 중소기업의 특성상 이는 어쩔 수 없는 한계다.

정부가 기업과 관련된 어떤 정책을 추진할 때는 이런 점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좋은 정책일지라도 수혜 기회가 동등하게 보장되게 하려면 중소기업에게 적정한 지원책을 별도로 강구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등한 기회의 실질적 보장은 단지 그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유의했으면 한다.

사자가 뭇 짐승들을 초대해 제대로 잔치를 벌이려면 여우에게는 접시에 담긴 스프를, 황새에게는 호리병에 담긴 물고기를 내 놓는 것처럼 각각에 대해 배려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