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년 이상을 청와대, 기획재정부, 행정자치부, 건설교통부, 국세청, 관세청을 비롯한 정부 부처는 물론 국회의원과 광역자치단체장 등 여러 기관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특히 세금은 내 삶의 일부라고 할 정도로 나는 오랜 기간 세금 분야에서 일해 왔다.
정부에서 조세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세금 불복업무를 처리하는 국세심판원장, 국세 집행업무를 담당하는 관세청장에 이어 국세청장으로 발령을 받자 언론에서는 ‘세금 그랜드슬램’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그랜드슬램(Grand Slam)은 통상 골프나 테니스에서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한 경우를 말하는데, 유일하게 세금에 관한 4대 주요 공직을 모두 거친 경력 때문에 영광스러운 수식어까지 얻었다.
나는 국세청장 이후에도 지방세 업무를 총괄하는 행정자치부 장관에 이어 국회의원으로서 세법을 제·개정하는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직접 입법 활동까지 했다. 세금은 조세법률주의가 기본원칙이기 때문에 국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모든 조세(내국세+관세+지방세)에 관해 정책 수립-입법-법령 시행-불복 심판까지 모두 거친 경력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다.
이렇게 평생 ‘세금쟁이’로 살면서 우리나라의 조세제도 및 세무행정의 발전과 나라 살림에 필요한 재원을 뒷받침하는 데 나름대로 크게 기여했음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세금과 만난 것은 운명적이었다. 공직자의 길에 들어선 것도 따지고 보면 세금 때문이었다. 나는 전라남도 함평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 어릴 적 꿈은 서부영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보안관이었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세무서와의 아픈 경험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농업이 기계화가 전혀 되지 않았던 때라 모심고 벼를 베는 큰 농사일에는 인부들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부들에게 오전과 오후 새참 때, 그리고 점심과 저녁 식사 때 막걸리를 대접했다. 먹는 것이 시원찮은 가난한 시절이라 ‘막걸리 힘’으로 일한다고 얘기할 정도로 막걸리를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막걸리 값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다. 이 많은 막걸리를 주조장에서 사서 인부들에게 주고 나면 농사지어 남는 것이 없을 만큼 농사 이윤이 박했다. 그래서 당시 농촌에서는 모내기와 추수 등 큰 농사일이 있을 때는 의례 집에서 직접 막걸리를 담가 농주로 쓰곤 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마을에는 막걸리를 제조 판매하는 주조장이 한 곳 있었다. 주조장 사장이 제일 부자이고 마을의 유지일 정도로 주조장이 당시 지역의 가장 큰 사업체였다. 주조장에서 매일같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동네 결혼식, 모내기 등 막걸리 수요가 있을 만한 큰 행사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집안에 이런 큰 행사가 있는데도 막걸리를 사지 않으면 주조장에서는 밀주를 담갔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담당인 나주세무서에 신고하여 해당 집에 밀조주 조사를 나오도록 했다. 당시에는 주세가 매우 중요한 세목이라서 밀주 단속이 세무서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였다. 세무서 단속원들은 밀조주 찾는 데는 귀신들이라 숨긴 곳을 여지없이 찾아내고 만다. 그런 날이면 우리 집은 초상집을 방불케 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 되곤 했다. 막걸리 값 아끼려다가 더 많은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1970년대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는 더러 세무서 직원 때문에 아픔을 겪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농가에서 판매 목적이 아니라 자가 소비 목적이라면 술을 담글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그 시절 세무서의 밀조주 단속원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을 실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외에도 취사와 난방을 위해 산에서 가져온 나무 때문에 산감(山監)에게 적발되어 힘들었던 집들이 비일비재했다.
나는 어린 시절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왜 공무원들은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는 것일까” “나쁜 공무원들로부터 착한 이웃들을 보호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골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 학교에서는 1년에 몇 번씩 단체로 함평읍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주인공이 ‘서부영화의 보안관’이었다. 그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영화처럼 용감한 보안관이나 정의로운 총잡이가 되어 나쁜 공무원들을 혼내주고 착한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안관이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은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무원의 꿈으로 바뀌어갔다. 당시에는 공무원들이 주도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시절이어서 정의로운 보안관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행정고시 준비를 시작해 대학 4학년이었던 1973년 10월,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만 22살의 젊은 나이, 전남대에서 재학생 중 행정고시를 합격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는 수재형 학생은 결단코 아니었다. 내가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이루겠다는 절실함과 집중력 덕분이었다.
행정고시 합격 후 6개월 수습과정을 거쳐 총무처로부터 발령받은 곳이 국세청이었다. 1975.4.7 여수세무서 조사과장이 첫 보직이었다. 세무공무원을 혼내주고 싶어 보안관이 되려 했는데, 세무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훗날 세무공무원의 수장인 국세청장까지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세금과 세무공무원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으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후 여수세무서 원천세과장과 목포세무서 부가가치세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집행부서인 국세청에서 근무해서는 내가 꿈꾸는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1979년 10월 중앙 경제부처인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의 전신)로 옮겼다. 재무부 첫 보직은 세제국 국제조세과였다. 되돌아보면 세금 그랜드슬램의 씨앗은 이때부터 잉태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