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은 서울길] "이 땅에 흙냄새 나면 아무 데라도 좋아라"

길따라 멋따라 '뚜벅뚜벅'…낭만이 터지는 서울

시원하게 뻗은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노라면 쌓였던 근심은 눈 녹듯 사라진다. 수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걷기는 건강도 챙길 수 있는 힐링 아이템으로 떠오른지 오래다.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어 일상에 지친 이들을 유혹하고 있다. 기분 좋은 햇볕이 내리쬐는 날을 선택해 신발끈을 동여매고 한 발 한 발 내딛으면 추억에 빠져 마음까지 평안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곳곳에 마천루가 솟아있고 바쁘게만 돌아갈 것 같은 서울 도심에도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산책로가 존재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나서도 좋고 연인, 친구, 가족과 함께 걸어도 좋을 낭만적인 길이다.

속설 때문에 포기하기엔 아까운 덕수궁 돌담길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가수 이문세가 읊조리듯 노래한 '광화문연가' 속 덕수궁 돌담길은 노란 은행나무가 길게 늘어서 행인들을 반기는 서울의 으뜸가는 산책로다. 시청역 1번 출구 앞 덕수궁 대한문을 출발해 경향신문사까지 1km 남짓한 코스는 정동길이라고도 부른다.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문화적 가치까지 높은 이곳은 한때 연인이 함께 걸으면 곧 헤어진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과거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면 서울가정법원을 만나기 때문이란 가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법원은 한강 이남으로 떠났고 고풍스러운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짧은 코스지만 이들의 발걸음을 머무르게 만드는 요소가 곳곳에 있다는 점은 덕수궁 돌담길의 큰 자랑이다.

개화기 근대 건축물과 현대식 건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외관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해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려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 100년의 역사를 품은 정동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손탁호텔(현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등 지난날이 녹아있는 역사적 공간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 길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수제 공예품 장터 등이 들어서 행인들을 반긴다. 정동길 한편 이화여고 담장에 수놓아진 공공미술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지켜보는 이들을 미소짓게 해준다.

1884년 영국대사관 부지가 들어서면서 끊겼던 돌담길 170m 구간을 서울시가 131년 만에 회복시키기 위해 나섰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시는 지난 5월 돌담길 전 구간을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대사관 측과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덕수궁 수문장과 영국 근위병이 순회 경계하는 방안도 추진할 예정이라 기대가 커지고 있다.

그윽한 옛것의 정취…성북동 고택 그리고 낙산공원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로 대표되는 성북동은 번잡한 도심 속에서 예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 보물 같은 장소다. 문학과 연관이 깊은 장소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사색을 하며 거닐기 더할나위 없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산실인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옛집을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경기지방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 이곳은 기념관으로 변해 옛 주인의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최순우 옛집을 나선 뒤 북쪽으로 뻗은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보자. 나무와 어우러진 여러 가옥들을 구경하면서 걸어가면 운치 있는 절간 대문과 마주하게 된다.

이 절이 바로 '무소유' 법정스님이 계시던 길상사다. 길상사는 본래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이 기도하는 절로 탈바꿈한 곳으로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김영한 씨가 여주인이었다. 김영한 씨가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명을 받고 대원각을 시주하면서 1997년 길상사로 거듭났다.

길상사는 김수환 추기경이 개사식 때 함께하면서 종교적 갈등을 넘어 화합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길상사의 행사 때 천주교 성직자들이 참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안에는 종교적 화합을 바랐던 법정스님의 마음을 담아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만든 관음보살상이 있다.

길상사에서 평안함을 얻고 나오면 수연산방으로 향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도심 속 한옥의 우아함과 은은한 향의 차를 맛볼 수 있는 수연산방은 1930년대 단편소설의 선구자인 월북작가 이태준의 가옥이다. 전통이 아닌 창의적 방식이 가미된 한옥이라는 점에서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다.

이어지는 코스는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11년간 지냈던 심우장. 성북동에서 심우장을 놓치고 돌아가면 섭섭하다. 다소 높은 언덕에 있어 가는 길이 녹록지 않을 수 있지만 조선총독부를 마주하기 싫어 북향으로 지은 만해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낮에 성북동 고택길에서 정취를 느꼈다면 저녁에는 한성대입구역에서 혜화문 방면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 좋다.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향하는 성곽길은 길도 잘 놓여있을 뿐만 아니라 서울 야경이 주는 아름다움이 그만이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와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조성된 이화 벽화마을까지 감상한다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오감만족' 시간여행 인사동·삼청동

서울에서 역사와 문화, 예술까지 모두 챙기고 싶다면 종로가 제격. 종로3가역 1번 출구에서 탑골공원을 끼고 우측으로 돌면 낙원상가 좌측으로 인사동이 나온다.

과거 예스러움만 간직했던 인사동은 쌈지길이 생기면서 이를 탈피하고 전통과 새로운 감각이 혼합된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신했다. 길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군것질거리를 비롯해 각종 갤러리, 전통 체험 공간, 공방 등은 나들이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인사동 길을 통과해 안국역 방면으로 방향을 설정하면 전통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마을로 갈 수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한옥보존지구인 북촌마을은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한옥 사이사이 골목길을 통과하다 보면 한류의 시작을 알린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 중앙고등학교가 나타난다. 이외에도 한국미술박물관, 가회박물관, 북촌생활사박물관 등 북촌에는 볼거리가 즐비하다. 만약 북촌 나들이가 처음이라 골목길 투어에 자신이 없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200여m 만 전진하면 나오는 재동초등학교 앞에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어 지도를 구할 수 있다.

북촌만 보기 아쉽다면 정독도서관에서 서쪽으로 가보자. 방금 전까지 느낀 전통이 아닌 스타일리시한 삼청동 골목이 기다리고 있다.

한옥에 꾸며진 서양식 레스토랑부터 각종 뷰티숍에 카페까지. 가장 한국적인 장소에서 이국적인 느낌을 건질 수 있는 건 분명 매력적인 요소다.

삼청동 골목길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어느 가게를 선택하더라도 독특하고 맛난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점. 나들이객의 발걸음이 종로로 향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