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국회처리가 여야 간 견해차로 난항을 거듭 중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은 미국이 비준한만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10월 본회의 처리 방침을 밝히고 있다.
반면 민주당 등 야당은 현재의 피해 대책으로는 불충분하다며 '10+2재재협상안'에 대한 협의를 거쳐 신중 처리하자고 맞선다.
기대를 모았던 17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이하 외통위)에서의 '끝장 토론'은 반대 토론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파행으로 끝났다.
18일 여당이 비준안의 외통위 상정을 시도하고, 야당이 회의장을 미리 점거하는 등 대결 국면이 전개되면서 10월 중 여당의 강행 처리와 야당의 결사 저지가 반복될 가능성도 커진다.
한·미 FTA가 발효되려면 아직도 밟아야 할 절차가 적지 않다. 불문법을 채택하는 미국은 의회에 제출된 이행 법안 처리로 추가 법 개정 절차 없이 바로 이행 단계에 들어간다. 반면 성문법 체제를 채택하는 한국은 비준안과 관련된 부수 법안에 대한 정비가 끝나야 발효의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발효에 대비해 고쳐야 할 관련법은 모두 25개다. 공인회계사법, 세무사법 등 9개 법률은 이미 개정을 마친 상태고 14개 법안이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2개 법안은 발효 후 3년 내 개정하면 된다. 이들 부수 법안은 통과되더라도 시행령, 시행 규칙 등 하위 법령을 FTA 협정문에 일치하도록 일일이 손봐야 한다.
최소한 이달 내에 비준동의안이 처리되고 내달 중 부수 법안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이 작업이 끝나야 정부는 미국에 FTA를 이행할 준비를 완료했다는 서한을 보낼 수 있다.
서한을 주고받은 뒤 양국은 FTA 발효 시기를 정한다. 서한 교환 이후 60일이 경과한 날부터 발효가 되지만 두 나라 합의로 별도 날짜를 정할 수도 있다. 양국 정부는 내년 1월 1일 FTA가 발효되기를 기대한다.
갈 길이 무척 바쁜데 민주당 등 야당이 발목을 잡는 격이다. 야당 측은 지난해 12월 추가 협상에서 이익의 균형이 깨졌다며 재재협상을 통해 균형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 당시 자동차와 돼지고기, 의약품 등 세 가지 분야 추가 협상에서 자동차 부분을 많이 양보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손해라는 것이 야당 측 주장이다.
반면 자동차는 양보를 했지만 돼지고기와 의약품 분야는 이익을 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깨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정부와 한나라당 입장이다.
민주당의 이른바 '10+2재재협상안'은 미국과 재재협상이 필요한 10개 항목과 국내 보완 대책 2개 항목을 합친 것이다.
10개 항목에는 40%인 쇠고기 관세의 철폐를 10년간 유예하고 개성공단 제품도 국내산으로 인정받으며 정부 규제로 피해를 입은 경우 상대 정부에 피해 보상 소송을 낼 수 있는 투자자의 국가 소송 제도 폐기, 역진불가조항 철폐, 자동차 세이프가드 발동 요건 강화 등이 담겼다.
국내 보완 대책은 국회가 정부의 통상 정책을 일정 부분 통제할 수 있는 통상절차법 제정, 그리고 FTA로 피해를 보는 제조업, 서비스업에 대해 무역조정지원제도를 강화하는 내용이다.
야당의 재재협상안 요구에 대해 정부와 한나라당은 미국과의 재협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다만 국내 보완 대책은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입장이다.
통상절차법의 경우 이미 여야정 협의체에서 합의를 보고 세부 내용 조율에 들어간 상태다. 미국이 비준을 끝냈기 때문에 재재협상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고 협정의 독소 조항을 해소하고 피해 산업인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농수산업에 대한 피해 보전책을 요구하는 야당의 주장을 '발목 잡기'로 일축하며 비준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한·미 FTA를 '미국 노동자들과 기업들을 위한 중대한 승리'라고 오바마 대통령이 대놓고 자축하는 마당에 재재협상까지는 가지 못한다 해도 실현 가능한 논의에는 최대한 머리를 맞대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정부와 집권당의 도리다.
개방 경제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특성상 한·미 FTA는 긴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일이다. 국제적 합의 못지않게 '국내적 합의'도 중요하고 여기에는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가 요구된다.
비준동의안 처리가 12월로 넘어가거나 내년 임시국회로 넘어간다면 한·미 FTA 발효는 그만큼 늦어진다. 외견상 비준 지연으로 우리가 당장 입게 될 손해는 없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대외 신인도가 떨어지고, 진행 중인 중국·호주 등과의 FTA 협상에 나쁜 영향을 미치며, 미국 시장 선점 혜택을 놓친다고 정부 여당은 조급해 한다.
비준동의안이 이달 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서울시장 보궐선거, 예산안 심의, 내년 총선 등 국내 정치 일정과 미국의 대통령 선거 등을 감안하면 '때를 놓칠'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미국이 협정 체결 후 비준에 4년이 넘게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국내 합의를 위한 비준 지연이 국익을 해친다고 단정하는 것엔 무리가 있다.
여당의 단독 강행 처리가 대외적으로 모양새가 더 좋지 않고, 한·미 FTA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비준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을 여야가 협상과 대화와 양보로 풀어낸다면 위기에 놓인 한국 정치와 경제를 한층 성숙한 단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고, 이런 모습을 대외적으로 내보이는 것이 더 국익을 위하는 길일 수도 있다.
정부도 나름대로 FTA 피해 기업에 대한 구제 범위를 넓히고, 중소 상공인과 피해 농가 지원을 위한 FTA 보완 대책 예산도 다소 늘리기로 하는 등 '마지막 카드'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도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한·미 FTA가 미국 의회를 통과한 데 대해 전 세계가 부러워한다"면 한국의 국내 비준 절차도 그에 맞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
FTA에 대한 과잉 기대나 지나친 의미 부여는 금물이다. "미국인들이 현대차·기아차를 산다면 한국인도 미국에서 만든 쉐보레·포드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주문이 당장 부담으로 다가온다.
국내 소비자들이 미국차를 계속 외면할 경우 자동차 수출 증대-미국 내 고용 확대에 대의명분을 내 건 한·미 FTA 앞날은 어떻게 될까.
경제의 글로벌화로 FTA 체결이 관세 철폐→수출 확대→설비투자 확대→고용 확대로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기업의 현지화와 소유의 글로벌화로 국가 단위의 FTA 영향력도 약화되는 추세다.
더구나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가 글로벌 금융 위기를 불러온 이후 FTA 체결에 대한 각국의 열기도 시들해지고 있다.
'FTA 허브=한국의 번영'이라는 낡은 도식을 넘어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지금의 한국에 필요하다는 바깥의 한 지적에 절로 공감이 간다.
[약력] :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워싱턴 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 주재 부국장, 경제담당 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