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한국을 다녀간 후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정부 여당은 두 정상 간 우의와 신뢰를 바탕으로 공고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며 '이명박 실용외교의 개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야당들은 북핵문제는 추상적 원칙의 재확인에 불과했고, 한미FTA(자유무역협정)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이라며 '알맹이 없는 정상회담' '아시아순방 귀국길의 들러리 방한'으로 깎아내렸다.
특히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FTA 자동차부분에 다시 이야기해 볼 자세가 되어있다"고 한 이명박 대통령의 '돌출발언'이 적지 않은 후폭풍을 몰아오고 있다.
우리 쪽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재협상한다는 뜻이 없다"고 진화했지만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들은 "한국정부의 자세가 180도 바뀌었다"고 크게 의미를 부여했다. 이 때문에 귀국길에 한국에 잠시 들른 오바마에게 속없이 아프간파병 2000명, 한미FTA재협상이란 비싼 선물만 안겼다는 볼멘소리도 쏟아진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대목은 오바마의 이번 아시아순방에서 한국의 자리매김이 불명해졌다는 지적들이다. G20정상회의 유치로 갑자기 중심국가가 된 것처럼 호들갑들이지만 정작 중국과 일본에 밀려 한국방문은 미국에서조차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오바마의 이번 아시아순방은 과거 미국 여느 대통령들의 순방과는 성격과 차원을 달리했다. 취임 후 근 1년만의 첫 동아시아 나들이는 '9일간의 고강도 장애물코스'(intensive 9 days obstacle course)에 비유됐다. 왕년에 군림하고 호령하던 위치에서 이 지역 강국들의 환심을 사고 비위를 맞추는 쪽으로 미국의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미국 최초의 태평양대통령(Pacific President)으로 자신을 내세웠지만 런던의 이코노미스트는 '퍼시픽' 대신 조심스럽고 겁이 많아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뜻의 '푸시푸팅(pussyfooting)대통령'으로 고쳐 부를 정도다. 중국방문은 8000억 달러의 재무부채권에 덜미가 잡힌 굴욕적 방문으로 묘사됐다.
아키히토 일왕에 90도 경배로 미국 국민들을 당혹케 만들면서도 이렇다 할 대접도 받지 못했다. 싱가포르에서는 미얀마 독재정권의 총리가 포함된 아세안회의에 이끌리듯 참석했다. 인류의 보편적 인권과 자유 등 미국적 원칙을 강조하며 브레이크를 걸던 왕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오바마는 중국의 후진타오주석에게 하와이산 바둑판과 돌을 선물했다. 양국이 바둑을 두듯 G2(주요2개국)시대를 열어가자는 함의가 담겨있다. "강력한 중국, 번영하는 중국은 국제사회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아시아구상도 내놓았다.
일본 역시 미국에 대해 할 말은 하겠다며 대등한 미·일 관계를 들고 나왔다. 미국이 아시아전략의 기본 축으로 삼아온 미·일 동맹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이 지역 역학관계의 기본 틀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주도의 세계화는 이미 막을 내리고 있다. 글로벌불균형과 기후변화 북한 및 이란 핵문제등 세계적 현안 해결에는 중국 및 일본과의 팀워크가 필수적이다. 종전의 미국일변도 외교만으로는 이 새로운 국면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
오바마의 '장애물코스' 달리기에서 한국은 그저 거쳐 가는 예외적 존재였다. 20시간의 체한일정 자체가 그랬고, 미국언론들의 관심도 그랬다. 북핵문제가 핵심현안이라고 했지만 국무장관도 오지 않았다.
북핵문제는 중국과의 협의가 더 중요했고 미국 특사의 북한 방문 발표 등 미 북 양자접촉에 더 무게가 실렸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니시어티브로 애지중지하는 '그랜드 바겐'은 원론적 내용의 재확인에 그쳤다.
6자회담 틀 내에서 북핵해결의 방법을 찾기로 한 것, 회담 재개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재확인 한 것을 무슨 큰 성과처럼 떠벌리는 것은 쑥스럽다. 미국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어김없이 찾는 필수코스가 주한미군들 위문방문이다. '공고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체제가 더욱 튼튼하게 됐다'고 자찬하는 것도 우습다.
중국이 대놓고 '노(No)'라고 말하고, 일본이 미·일 동맹의 포괄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새로운 동북아정세속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와 국가전략도 당연히 질적으로 달라져야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대미외교는 '포괄적 전략적 동맹관계'라는 추상적 수사(修辭)에 도취돼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지난주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한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정전협정체결의 당사자가 아닌데다 평화협정체결은 한·미동맹의 소멸 내지 주한미군철수까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가 협상타결 후 미국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미 의회의 반대라는 벽에 부닥쳐 2년9개월 가까이 낮잠 자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FTA는 실질적 내용이 중요하지 체결만이 능사가 아니다. 미국의 문제제기와 압력으로 한국 자동차시장은 문호가 활짝 열렸지만 그 혜택은 유럽과 일본차가 누리고 있다. 외제차들이 서울 길거리를 질주하는 광경을 오바마에게 직접 보여주었어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이후 '한미동맹 복원' '비핵개방3000'을 내걸고 반미를 금기시해왔다. 대미자존과 대북화해노선을 추구한 김대중 노무현 외교를 전면 부정한, 외교이념상의 널뛰기였다. 모든 종류의 미국정책에 대한 반대는 반미로 간주하며 스스로를 국내지지기반인 보수적 이념 틀 속에 가두어놓고 있다.
그러나 국익의 확보는 친미와 반미의 구도를 넘어선다. 북핵문제가 북미주도로 해결되고, 한미FTA 비준에 미국이 계속 성의를 보이지 않을 경우 친미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연 이승만대통령과 같은 반미전술을 사용할 의지와 역량이 있을 것인가.
친미도 반미도 외교목적을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단선적 차원을 넘어 복합적 다차원적 국가전략을 수립할 때다. 그렇게 하려면 정권에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양끝을 오가는 대미외교의 중심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