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정상의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이 구글의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에서 무릎을 꿇었다.
5판 3승제로 진행된 이번 대결에서 이세돌 9단은 1,2,3국 세 번 내리 불계패를 당해 승리는 알파고에 돌아갔다. 비록 내번 째 대결에서 이겨 인간의 자존심을 지켰지만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는 충격을 온 세계에 안겼다.
바둑은 19×19의 반상에서 바둑돌을 놓는 경우의 수는 우주의 원자보다 많다고 한다. 5000년 바둑 역사에 똑같은 기보는 하나도 없고, 인간의 직관과 감각이 다양한 기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데이터를 통해 학습할 수밖에 없는 컴퓨터가 바둑에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의견들이 많았었다.
이번 대국은 인간 대 컴퓨터간의 대결 이벤트 차원을 넘어선다. 알파고는 바둑 대국에서 이미 이겼지만 더 큰 승리는 바둑너머에 있다. 세계의 관심을 인공지능과 그 비즈니스에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올 초 다포스포럼에서 인공지능이 4차 산업혁명을 견인할 것이라는 새 화두가 큰 관심을 모았다. 2025년까지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시장규모가 200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상도 뒤따랐다. 구글은 알파고 대국이라는 '세기적 쇼'로 인공지능 기술의 선두주자 이미지를 굳혔다. 구글의 수뇌들이 서울로 몰려와 승리를 자축할 만도 했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는 지난 2010년 영국에서 설립돼 구글이 2014년 인수한 회사다. 알파고는 '으뜸가는 바둑기사'라는 뜻이다. 바둑게임은 일본말 '고'(碁·기)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Go'가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알파'는 첫째, 으뜸을 뜻한다.
인간의 신경망을 본뜬 인공신경망이 광범한 데이터를 분석해 패턴과 의미를 찾아내는 이른바 딥러닝(deep learning)기술의 최신 산물이다. 알파고 설계자이자 최고경영자 데미스 허사비스는 범용 인공지능 최고엔지니어로 구글에 인수될 당시 페이스북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굴지의 IT기업들이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었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 IBM의 컴퓨터 체스프로그램 딥블루가 당시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2011년 IBM 창업자 이름을 딴 왓슨 컴퓨터가 TV 퀴즈 쇼(Jeopardy)에서 인간 챔피언들을 줄줄이 이겼다. 하지만 이들 게임은 경우의 수가 10의 170승이라는 바둑에 비하면 암기로 벼락시험을 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알파고의 승리는 두 가지 학습법의 조합의 승리로 분석된다. 딥러닝 기법으로 기존의 기보들을 광범하게 학습하는 한편 두 개의 컴퓨터프로그램으로 서로 대국을 시켜 기존 기보에 존재하지 않는 빈틈과 수(手)를 확인하고 스스로의 지능을 높여나가는 이른바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번 대국과정에서 드러났듯 알파고는 완벽하지는 않다. 바둑의 속성에 가장 적합한 인공지능 요소 기술들을 조합해 만든 바둑에 특화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앞으로 수많은 대국을 통해 이기고 지면서 학습을 수행할 참이다.
구글은 알파고를 통해 범용 인공지능 개발을 앞당기고 이를 사회 여러 분야의 기술적 난제 해결에 원용할 목표다. 딥마인드의 다음 프로젝트는 의료와 가정용 로봇 분야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딥러닝 인공지능 기술을 기반으로 자동차·금융·제조·물류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증기와 전기 IT에 이어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인공지능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의료, 금융, 법률 분야에 적용하는 대대적인 실험이 다투어 진행 중이다.
IBM의 인공지능 왓슨을 기반으로 한 지능형 법률 자문회사도 생겨났다.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 기법을 이용해 수백만 건의 법률 자료를 순식간에 분석하고 패턴을 추출해 관련된 분쟁의 방향을 예측하는 지능형 법률서비스도 등장했다.
자율주행차를 핵심 동력중 하나로 선정한 구글은 미국 마운틴뷰 본사 주변 도로에서 매일 수 십대의 자율주행차를 굴리며 자료를 수집한다. 자율주행차로 주행한 거리만 330만km라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런던에서 경제학자가 영어로 연설하면 남자 목소리를 지닌 인공지능이 중국어로 동시통역하는 장면을 연출해냈다.
구글은 현장의 상황을 설명하는 로봇을 만들었다. 위험지역에서 카메라를 장착한 기계가 설명하면 중동의 IS(이슬람국가)와 쿠르드 전사가 싸우는 살벌한 전장에 기자가 가지 않아도 본사 편집 데스크에 앉아 들여다보며 현장 상황을 뉴스로 내보낼 수 있다.
바둑의 알파고 처럼 최고의 의사 변호사 기자 우주기술자 펀드매니저들을 인공지능으로 마구 찍어내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모든 산업분야가 인공지능 및 빅 데이터 기술과 융합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구글은 지난 2013년 이후 로봇 관련회사 7개, 인공지능 관련 회사를 4개나 매수해 적극적인 마케팅 공략을 펼치고 있다. 제조업 혁신을 위해 앞서가고 있는 독일도 '인더스트리 4.0'이라는 발전 전략을 세워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활용한 자율 분산적 생산시스템 구축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전쟁은 시작됐다.
인공지능이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하고 있고 그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영국의 일자리 35%가 20년 이내 인공지능로봇으로 대체되고 미국의 702개 직업가운데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들도 나왔다.
물론 인공지능은 만능이 아니다. 서류작성이나 데이터 검색처리 등 일정한 형식이나 틀을 갖춘 정형적인 업무는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직관이나 창의성, 감정 등이 필요한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기는 어렵다. 딥마인드 허사비스는 “알파고는 초당 수 만 번의 수를 계산하지만 이세돌 9단은 순전히 사고의 힘으로 경기를 펼쳤다”며 그의 순수한 천재성에 경의를 표했다.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 알파고 대국에 쏠린 국민적 관심을 지속성 있게 인공지능 관련 기술발전으로 이어가는 국가적 노력이다. 인공지능 기반의 기술혁신이 산업, 고용, 서비스, 삶의 방식 등 전반에서 근본적 혁명을 불러오고 있다. 기존의 제조업과 서비스업 및 정보통신기술(ICT) 융합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개발하고 기술 확보와 인력양성, 나아가 산업화를 위한 인공지능 생태계 구축을 관민이 서둘러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