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세관 김경일 관세행정관이 작성했습니다.)
강남 유흥업소로?
이제 홍콩 혐의계좌로부터 자금을 수령한 내국인 150여명을 추적해 접촉해야 한다. 그들이 홍콩에 페이퍼컴퍼니로부터 수령한 자금의 성격이 무엇이고, 피의자와는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출근하면서 퇴근할 때까지 입수한 연락처로 밤낮 가릴 것 없이 전화를 걸어댔다. 전화를 하면 대부분 전화를 받지 않던가, 받아도 몇 마디 못하고 끊던가, 우리에게 되레 화를 내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그렇게 계속되는 시도에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A라는 여자의 부탁을 받고 계좌명의만 빌려주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중 한 사람인 S를 설득해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낮에는 만날 수 없고 밤에만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얼까? 다름 아닌 강남일대 유흥업소 종사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만난 장소가 역삼동 유흥가였다. 소위 룸싸롱이었다.
우선 여러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저녁 9시에 접촉자가 지정하는 술집 앞에서 만나기로하고 강남 술집 일대를 헤매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첩보작전을 펼치는 것처럼 근처 커피숍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다.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S가 종사하는 술집 마담 A씨가 "해외로부터 돈을 송금 받을 것이 있는데 계좌를 좀 빌려 달라"고 해서 계좌번호를 알려 준 것뿐이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계좌도 모아 알려주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돈이 입금되면 현금 등으로 인출해 A에게 전달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제야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젠 A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A를 만나기 위해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유흥업소 직업의 특성상 낮에는 전화통화가 되지 않았다. 메시지를 남겨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며칠 전 만난 S가 분명 우리를 만난 사실을 A에게 이야기 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현 상황에 대해 이미 A가 낌새를 챈 것일까. 저녁에도 수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통화가 되질 않았다. 답답하다.
그렇게 수사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켜 먹고 사무실 책상머리에 앉아 본능적으로 전화 수화기를 들고 이미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번호를 눌렀는데 통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세관출석을 위해 약속 일자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A는 자신이 일하는 룸싸롱으로 와서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닌가. 우린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혹시나 우리를 감금하는 등 만일의 상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려 근처 커피숍으로 나올 것을 유도했다.
약속 당일, 오반장과 난 약속 장소로 이동하려 준비 중 A로부터 연락이 왔다. A는 오늘 만날 약속을 파기하고 다음 주 월요일 세관으로 출석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우리로서는 행운이 따른 것이다.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A가 세관에 출석했다. 향수 냄새가 조사실 전체를 흔들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 한잔을 마셨다. 잠시 후 A는 주범인 피의자 J와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평소 A의 룸싸롱에 출입하던 피의자 J는 A에게 부탁하여 화류계 종사자들의 차명계좌를 모집한 것이다. 계좌를 빌린 대상은 마담, 웨이터, 주방 아줌마, 대리기사 등 다양했다. 이제 피의자 J의 범죄행위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국내로 귀속해 정당한 세금을 납부해야 할 재산을 홍콩으로 도피시킨 후 일부는 가족 명의 미국, 스위스 등 해외계좌로 이체해 송금하고 일부는 우리 외환당국의 감시망을 피할 목적으로 국내 150여명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미화 1만불씩 분산해 국내로 반입, 비자금 등 개인용도로 사용한 것이다.
수갑 & 꿈
드디어 피의자 J를 소환한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J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 경위를 설명하고 세관에 출석해줄 것을 요구하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나에게 반문한다. J가 약속 일자에 세관에 출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출국금지된 상태임을 본인도 알았을 터이다.
국제사법공조해 홍콩에서 온 혐의계좌의 입출금 내역과 A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차명계좌 내역 등 이미 드러난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 추궁하자 조사과정 내내 엉뚱한 답변으로 일관한다. 본인 명의 홍콩계좌 거래내역인데 자기계좌가 아니라고 하고, 해외로 도피된 자금이 명백히 J의 자녀들 명의 해외계좌로 다시 송금된 사실을 제시하는데 자기 돈이 아니라고 한다.
공범인 K도 마찬가지 변명으로 일색한다. K가 메모하고 정리해둔 내용과 이메일 내용처럼 동일하게 자금이 또 다른 페이퍼컴퍼니로 송금되었는데 왜 그렇게 송금됐는지 자신은 모르겠다고 한다. 자금이 흘러간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도 비상식적인 진술로 답변을 회피해 간다.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이미 계좌거래내역으로 확인된 사실을 부인하다니" 오반장이 한마디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연일 J와 K를 번갈아가며 소환한다. 벌써 J는 6회째이고 K는 11회째 조사다. 계속되는 야근과 조사에 심신이 지쳐간다.. 하지만 사건이 재기된 것을 알게 된 피의자들은 차명을 이용한 A등 주변 지인들을 포섭해 증거 인멸을 시도 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마음이 급하다.
우려한 대로 피의자들은 A와 차명을 이용한 국내 영수자들과 접촉하며 증거인멸을 시도한 것이 통화내역 조회를 통해 확인되었다. 우리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구속영장신청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 출근하기로 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딸아이가 또 아빠 사무실에 따라온다고 한다. "아빠 사무실에 중요한 일이 있어. 다음에 같이 가자" 이 말을 듣고 딸아이가 울려 한다. 하는 수 없이 딸아이를 차에 태우고 사무실에 오는데 딸아이의 얼굴엔 마냥 웃음이 가득하다.
영장을 치고 있는데 딸아이가 전번처럼 또 노란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그려준다. 바로 '수갑'이다. 내 책상 옆에 있던 수갑 케이스가 신기했던지 케이스에 그려진 수갑 그림을 포스트잇에 그려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순간 느낌이 좋았다.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영장실질심사가 있기 전날 나는 꿈을 꾸었다. 피의자들이 어떤 병원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영장실질심사 당일, 심문순서는 접수한 선착순이라는 관례를 검찰파견 근무시 알고 있었던 나는 당일 제일 먼저 법정에 도착해 1번을 받아두었다. 무슨 아파트 청약딱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왠지 모를 조바심 같은 마음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1번을 받지 못하면 앞 순번 심문이 끝날 때까지 종일 기다려야하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 사건의 심문이 길어졌다. 장장 3시간. 세관 사건의 경우 1시간 내외의 심문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통상적인데 우리 사건기록의 구석구석을 정확하게 보시고 치밀하게 심문하신다. 사건자료가 방대함에도 꼼꼼히 살피신 판사님의 성의가 돋보였다. 우리는 심문을 끝내고 뒤에 순번을 기다리던 경찰관들의 짜증스런 한숨소리를 뒤로 한 채 법정을 나와 피의자들을 S경찰서에 인치했다.
피의자들을 인치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구속영장발부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딸아이의 수갑 그림과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꾼 병원 꿈, 그리고 영장실질심사 내내 느낀 조사직원으로서의 느낌이 그것이다. 영장실질심사 결과는 보통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사무실에서 대기하며 차후 일정을 준비하고 있던 중 법원 영장계로부터 연락이 왔다.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이다.
우린 영장을 수령해 S경찰서에 입감되어 있는 피의자들에게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집에 돌아오니 새벽 3시다. 나는 집이 가깝지만 동료 오반장이 집이 부천이라 집이 멀어 못가고 근처 찜질방에서 잤다. 내일 다시 출근하려면 그게 낫다고 한다.
꾀병
다음 날 아침 과장님께서 구속기간동안 통신대기를 잘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이유인 즉 경찰서에 입감된 피의자들이 심통을 부려 수사관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과장님의 과거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었다. 나는 "설마 그러기야 할까요?"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아뿔싸. 과장님의 말씀이 옳았다. 구속입감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을 마치고 저녁 9시가 좀 넘어 퇴근하려는데 S경찰서 상황실로부터 긴급한 연락이 왔다. "세관에서 입감시킨 피의자 J가 두통 등을 호소하며 병원진료를 강하게 원하고 있다"며 J를 출감시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경찰서 당직자에게 긴급한 상황인지를 물어보니 입감자가 강하게 병원진료를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병원진료 차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경찰서로 바로 출발한다. 도착해 보니 경찰관이 우리에게 1일 면회 가능 횟수는 최대 3회이고 1회당 5명까지 가능한데 피의자는 오늘 3회 면회를 실시했고 면회인원도 매회 5명이었다고 말해주며 "면회 당시에는 몸 상태가 양호했던 것으로 보였는데 현재는 병원진료를 원하고 있는 걸로 봐서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귀뜸 해준다.
일단, 우리는 피의자를 출감시켜 인근 강남S병원 응급실에서 진료(CT촬영, X-Ray촬영,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를 실시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피의자는 침상에 누워 링거 주사를 투여 받으며 편히 잠들어 있다. 오반장과 나는 불침번을 교대로 서가며 검사결과가 나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검사종류가 많아서 그런지 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새벽 1시가 넘어 담당의사로부터 모든 검사결과 '특이사항 없음'이라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꾀병이었다.
나는 J가 얄미웠다. 우리는 J를 다시 호송해 경찰서 유치장에 입감시킨 후 집에 도착하니 2시가 넘었다. 오늘도 오반장은 집이 멀어 귀가하지 못하고 인근 찜질방에서 잔다고 한다. 영장실질심사 전날 꾼 병원 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메리카노
사건송치 전날, 이제 사건기록에 정이 들었나보다. 손 때 묻은 사건서류를 송치하려니 딸을 시집보내는 것처럼 아쉬운 마음뿐이다. 지금의 우리 딸을 시집보내려할 때도 이런 기분일까. 방대한 사건기록을 편철하며 한장 한장 넘겨본다.
입하(立夏)가 지난 화창한 5월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을 검찰로 송치하는 날이다. 눈발이 휘날리던 한겨울인 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숨 가쁘게 달려 온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계장님을 비롯해 우리 계원들은 S경찰서 에서 피의자를 출감해 검찰로 호송 중이었다.
중간정도 왔을까.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받고 대기 중에 피의자 J가 갑자기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 건너 커피전문점에 잠깐 들러 아메리카노 한잔을 먹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황당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공범인 피의자 K가 J를 핀잔한다. 커피를 좀 끊으시라고. 이때 J가 K를 향해 쏘아 붙인다. 넌 담배나 끊으라고.
에필로그
사건 송치 후, 난 다른 사건 정보수집 차 베트남 하노이에서 동료 K반장이 카톡으로 링크해 보내 준 2015년 5월 18일 KBS 9시 뉴스 언론보도를 보면서 그 동안의 수고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검찰로 송치된 사건 피의자들은 100억원이 넘는 재산국외도피 및 자금세탁 혐의로 기소되었고, 우리는 본 사건과 관련해 정당한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수익에 대해 탈세한 부분의 자료를 국세청에도 통보했다.
이번 사건은 국제사법공조해 세관에서 재산국외도피 혐의로 구속송치 후 기소된 첫 번째 사례로, 홍콩·싱가폴 등 해외에 은밀하게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등 유령회사를 통해 대한민국 재산을 국외로 도피해 정상적으로 납부해야 할 세금을 비정상적으로 탈세하는 재산도피 및 자금세탁 사범에 따끔한 경고의 일침을 가한 것이라고 스스로 평가해 본다.
해외에 불법적으로 은닉한 재산일지라도 언젠가는 세관의 외환 추적망에 적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쾌거라 생각되며, 5년 전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국제사법공조까지 요청해 지금의 결실을 보게 한 당시 본청 및 서울세관 외환조사과 직원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 서울세관 외환조사과는 앞으로도 홍콩·싱가폴 등 조세회피처를 이용해 더욱 지능화되어가고 교묘해지는 재산도피 및 자금세탁사범에 대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국제사법공조 등 첨단수사기법을 활용, 외환비리 단속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지금도 내 책상 위 모니터 하단에는 사건이 한창이었던 당시 딸아이가 노란색 포스트잇에 그려 준 "♡아빠 사랑해요♡"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