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국민과 정부간의 약속이다 = 기본적으로 세금은 국민의 동의 하에 정부가 국민의 재산권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세법이라는 '계약서'에 언급된 방법을 통해서만 실행되어야 한다. 이번 연말정산 사태는 세금을 부담하는 당사자에게 제대로 된 설명과 이해과정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인 계약'으로 인한 것이었다. 동의없는 과세에 저항은 필연적인 것이다.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없이 국회에서 의사봉만 두드려 만든 세법은 진정한 세법이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지난해 말~올해 초 대한민국을 뒤흔든 연말정산 대란은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이 때문에 헤아리기 힘든 사회적 비용이 지출됐다.
지난 7일, 정부는 연말정산 보완대책을 발표하고 사실상 2013년 세법개정으로 파생된 정책효과를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나마 건진 것이 있다면, '조세형평'을 위한 세법개정이었다는(소득공제→세액공제) 명분 뿐이었다.
현 시점에서 연말정산 대란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고 책임을 규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러한 문제가 또 다시 재현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조세형평이 이 정부가 떠받드는 핵심가치라면 그 가치에 맞게끔 제도를 재설계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 시도는 정부 혼자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국민'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말정산 대란은 우리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져 준 일대 사건이다. 이를 '전환점'으로 삼아 미래를 개척하는 일, 이 중요한 숙제를 풀어가야 한다.
'교훈(敎訓)'
85%의 국민은 세부담이 늘지 않았다고 해서, 나머지 15%의 국민은 소액의 세부담만 늘었다고 해서 연말정산 대란은 실체가 없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정책당국으로서 너무도 무책임한 태도다.
지금이 군사정권 시절도 아니고, 국민들이 세금 1, 2만원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교육수준을 가지지도 않은 것이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2013년 세법개정안 발표 이후, 연말정산 대란이 촉발된 시점까지 시간을 되짚어 보면 어렴풋이 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2013년 8월 세법개정안 발표 이후 정부는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하지만 그 역풍은 정부가 급히 세법개정안을 일부 수정해, 세부담 증대가 시작되는 지점을 고치면서 잦아들었다. 그 이후에는 그 누구도 이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았다.
2014년 12월, 수많은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국회는 '국민건강'을 명분으로 담뱃값 인상이라는 초강수를 둔다. 국민들이 주목한 지점은 담뱃값 인상을 인해 정부가 얻게 될 세수규모였다. '꼼수증세' 논란을 촉발시킨 지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말정산으로 인한 소규모의 세부담 증가는 국민들의 피부에 큰 자극을 가했다. 정당하지 못한 세금은 부담하기 싫다는 것, 어느 정도 언론의 부풀리기가 가미됐을지 몰라도 반발여론의 기저에 깔린 국민들의 인식은 바로 이 것이었다.
조세는 '정당성'이 생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민들이 GNP의 12% 가량을 군사비로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은 것은 전쟁과 국방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 '철의 여인' 대처 수상을 실각케 만든 원인은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은, 인두세(Poll Tax)를 밀어 부쳤기 때문이다.
원칙적인 명분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명분도 중요하다. 담뱃값 인상을 포함해 연말정산 대란을 촉발시켰던 2013년 세법개정안은 원칙적 명분이 아닌 현실적 명분에서 힘이 없었다. 정부의 현실(세수확보)만이 더 도드라지면서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다.
'형평(衡平)'
근로자와 관련한 조세체계(연말정산)를 현실에 맞게 고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제도를 고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다수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2013년 세법개정의 패인은 이 여론수렴 과정이 생략됐었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
조세의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형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만연해 있는 '색깔론'에서 조세정책을 분리해 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즉, 부자(富者)와 빈자(貧者)를 가르는 형태의 정치적 접근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수 년 동안 조세정책 논의의 뼈대는 이 색깔론의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상대적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서는 세금의 누진도를 강화하고 저소득층은 계속해서 줄이는 형태의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접근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소득층은 현행 세법 구조상 막대한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연간 총급여(연간근로소득에서 비과세소득을 뺀 금액) 5400만원인 근로자A와 3억원인 근로자B가 있다고 하자. A의 경우 기본적인 세액공제(근로소득공제, 본인기본공제)만 적용했을 경우 연간 소득세는 415만원(주민세분 제외, 실효세율 7.7% 수준)이다.
반면 같은 조건의 근로자 B는 8628만원(주민세분 제외, 실효세율 28.7% 수준)을 부담하게 된다. 실효세율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A와 B의 총급여차는 5.5배지만 실제 부담하는 세금액수는 20배 가량 차이가 난다.
실제로 정부가 2014년 귀속 연말정산 결과를 전수조사한 결과 총급여 5500만원 이하 근로자의 실효세율은 1.29%인 반면 총급여 7000만원 초과 근로자의 실효세율은 11.84%였다.
특히 전체 1600만여명의 근로자 중 절반에 가까운 근로자들은 '면세점' 이하로 근로소득세를 단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이는 형평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응능부담의 원칙과도 부합되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는 필요한가
소득이 있다면 당연히 그에 맞게 세금을 내야한다. 하지만 현행 근로자에 대한 조세체계는 그렇지가 못한 형편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서는 사실상 징벌에 가까운 세부담을 지우면서 저소득 근로자는 '저소득'이라는 이유로(?) 단 돈 10원도 소득세를 부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세법체계를 고쳐야 한다는 지적은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가장 현실적 대안이자 찬반 양론 또한 명확히 갈리는 부분이 법인사업자와 개인사업자에게 적용하고 있는 '소득세 최저한세제'를 근로소득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관점에서 볼 때 가장 확실한 정책대안이라는 것이 찬성론자들의 입장이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연구실장은 "근로소득자 중 면세자가 너무 많은 것은 문제다"라며 "근로소득세에 최저한세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국민이라면 일정 부분의 세부담을 져야한다는 원칙에 따르면 근로소득자 중 절반 정도가 많은 공제로 인해 세금을 안내는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다"며 "다만 사업소득자나 법인소득자 즉 기업들의 세부담 수준과의 형평을 고려해 현실적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안창남 강남대 세무학과 교수는 "법인세의 경우 조세감면을 적용하고 난 뒤 낼 세금이 없는 경우 최소한의 세금은 내도록 하자는 것이 최저한세율"이라며 "소득세는 기본적으로 소득이 있어야만 세금을 낸다. 먹고사는데 쓰는 돈은 제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일용직 등의 경우 연소득이 3000만원이 안된다. 그 사람들에게까지 최저한세제를 적용하자는 것은 국민개세주의를 너무 확대해석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강상엽, 류성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