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한 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킨다는 '신뢰'를 무기로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 대통령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복지공약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고 '부자증세'를 기반한 복지를 내세운 문 후보는 박 대통령의 '증세없는 복지'에 밀려 패했다.
일각에서는 '국민들은 복지확대는 찬성하지만 정작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어한다'고 해석했지만 전문가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증세없는 복지 확대'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지만 약속을 지키는 박 대통령을 일단 믿고 보자는 심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복지공약 실현을 위한 재원마련 대책이 현실성이 없다며 복지공약 수정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박 대통령은 방향을 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인 2013년 5월 공약가계부를 내놓아 복지공약 실현이라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여기에는 기초노령연금 공약 수정이라는 여파도 있었다.
만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에게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겠단 박 대통령이 '신뢰'를 져버리고 공약을 수정한 것은 지지층의 반발은 물론 야당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고 이후 정부는 만성 세수부족 상황에 시달리면서도 복지공약 수정이란 카드를 선뜻 내놓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 '신기루' 된 복지재원 134조원 = 2013년 5월 기획재정부가 주문생산한 공약가계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공약 이행에 필요한 예산은 134조8000억원이다.
정부는 세입확충으로 50조7000억원, 세출절감으로 84조1000억원으로 공약 이행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는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런 공약 이행 계획을 내놓은 적이 없다며 실컷 자화자찬까지 했다.
'약속을 지킨다'는 면에서 역대 정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면을 부각시켰지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3년차인 현재, 오히려 공약가계부가 현 정권의 발목을 잡고있는 모양새가 됐다.
당시 정부는 비과세·감면 정비로 5년 간 18조원, 지하경제 양성화로 27조2000억원, 금융소득 과세강화로 2조9000억원을 확보하겠다고 밝혔고 국정과제 재투자로 40조8000억원, 복지분야 세출 구조조정으로 12조5000억원 등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일몰이 도래하면 비과세·감면 제도를 종료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탈세규모나 탈루혐의가 큰 분야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비과세·감면 정비 분야만 보더라도 정부의 계획은 이미 한참 어그러졌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출범 첫 해인 2013년에는 19개의 비과세·감면 제도를 폐지하고 36개를 축소했으며 10개를 신설해 3조원의 세수효과를 만들어냈다. 지난해에는 7개 제도를 폐지하고 8개를 축소, 6개를 신설해 겨우 1231억원을 확보했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올해 일몰이 도래한 88개 비과세·감면 제도 중 가장 감면액이 많은 것이 농어업용 석유류에 대한 간접세 감면으로 제도의 대부분이 농어업, 사회복지, 보건 분야에 몰려있다. 세금혜택을 쉽게 축소하기 어려운 분야로 정부의 계획대로 모두 폐지하거나 축소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재원확보도 어긋난지 오래다. 정부는 당초 세무조사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정부 스스로 세무조사를 통한 세수확보 효과는 미미하다고 시인, 세무조사 강화 방침에서 완화로 방향을 틀었다.
사회간접자본(SOC), 복지분야 등의 세출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정부의 계획도 물거품이 됐다. 보건·복지·고용 예산은 2014년 106조4000억원에서 올해 115조5000억원으로 늘었고 SOC예산도 23조7000억원에서 24조4000억원으로 증가했다.
□ 뜻하지 않은 변수들…구멍 숭숭난 가계부 = 엄밀히 말하자면 공약가계부에서 밝힌 134조원의 재원은 없어도 그만인 돈이다. 공약가계부에서 밝힌 134조원의 재원은 국세 수입에서 끌어다쓰겠다는 것이 아닌 추가로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던 만큼 순전히 박 대통령이 말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체된 경기는 정부의 바람처럼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고 세수결손 규모는 2013년에 이어 2014년도 10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13년 세수결손 규모가 사상 최대였다는 8조5000억원이었지만 지난해에는 이를 뛰어넘는 9조7000억원(잠정치)으로 집계되고 있다.
공약가계부에서 말한 재원 마련은 커녕 거둬야 할 세수조차 펑크가 나면서 재정을 운용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예상치 못한 세월호 사고는 내수경기를 더욱 침체시켰고 이번에 촉발된 연말정산 대란은 설 대목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정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담뱃세 인상으로 2조원의 개별소비세를 확보하고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으로 소득세수를 9000억원 더 걷는 등 일종의 '증세'를 하려고 했지만 정부의 세수결손분을 메꾸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뿐더러 이마저도 여론의 반발로 어렵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치권이 먼저 '증세없는 복지는 없다'고 선언, 정부의 공약가계부 수정을 요구하고 나섰고 정부는 복지 수정이냐, 증세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 '꼼수 증세'의 한계, 대책이 필요하다 = '증세없는 복지'의 궤도수정을 요구하는 정치권과 달리 정부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공약가계부는 성실히 이행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쳐 놓은 단단한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달게 감내하고 있는 형국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연말정산 현안보고에서 "복지공약은 공약가계부대로 하고 지하경제 양성화나 세출 구조조정을 통해서 재원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공약 수정이나 증세 논의는 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증세없는 복지' 수정 요구가 봇물치자 최 부총리는 "국회가 먼저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준다면 증세를 논의할 수도 있다"고 한 발 물러섰지만 "지금은 증세를 논의할 타이밍이 아니다"라며 증세는 계획에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마땅한 대책 마련없이 이대로 가다가는 당장 연말정산 완화로 인해 줄어들 세수입 4000억원을 메꿀 방법이 없다며 아우성이지만 최 부총리는 공약가계부의 수정조차 거부하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지금의 복지구조를 다시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공공정책연구실장은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복지정책을 실행하려면 당초 대선공약에서 밝힌 재원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들어간다"며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조 연구실장은 "보편적 복지는 돈은 많이 들어가는데 소득재분배 효과는 크지 않다"며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등록금, 기초연금 등 보편적 복지는 비용은 많이 들어가는 반면 저소득층에 집중되는 면이 떨어진다. 이런 복지제도를 먼저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완규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증세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 현 상황에서는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며 "복지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증세하던지, 증세를 안하려면 복지지출을 줄이던지 둘 중 하나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