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이 '조세법률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납세자인 국민들의 권익을 위해서다. 국민들이 국회를 대표자로 세우고 법률제정권을 부여한 것은 권익에 반하는 법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국회가 보이고 있는 행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정치적 선택에 따른 법률제정권의 남용, 국민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는 세법을 제대로 된 여론 수렴과정도 없이 뚝딱 해치우는 용납하기 힘든,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부도 이에 편승, '목적' 지향적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다. 여론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정치권의 움직임에만 매달려 널뛰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도 수많은 정부 세법개정안과 의원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됐고, 여야는 세법개정안에 담긴 내용들을 '부자감세', '세제정상화' 등으로 뭉뚱그려 각자의 정치적 색깔에 맞게 찬성과 반대 입장을 내놨다.
이후 대다수의 세법개정안(예산부수법안)이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12년만에 법정시한을 지켜내며 국회의 벽을 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부 법안은 여론수렴 과정도 생략된 채 처리됐다.
법률 개정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 세법심의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책수요자인 국민의 입장이 대변되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올해 사회적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담뱃값 인상이나 사내유보금 과세 등 정책발표 당시 국민과 기업들의 반감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정책방향을 결정지었다.
공청회도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진행되는 입법절차에 국민들은 대처할 수단도 힘도 없다. 납세편익을 위한다는 조세정책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정치적 실익만이 난무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 졸속 세법심의 유발자 '국회선진화법' =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정기국회는 매년 1회, 9월1일부터 12월9일까지 100일간 열린다. 정기국회는 통상적으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시작으로 대정부질문, 국정감사, 예산안 심사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예산안은 정부의 국정운용방향이 담긴 만큼 까다로운 절차와 심의가 이어진다. 우선 국회는 국정전반에 관해 소관 상임위원회별로 매년 정기회 집회일 이전 감사 시작일로부터 30일 이내의 기간을 정해 국정감사를 실시한다.
이후 예산안과 결산에 대해 소관 상임위 회의를 진행하고, 예비심사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종합심사가 이루어진다.
다만 올해부터는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법안심의 체계가 변화됐다. 예산안 및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에 대한 본회의 자동부의 제도와 예산안 등에 대한 무제한 토론 자동 종결 제도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실제 개정된 국회법 85조 3항은 '위원회는 예산안 등의 심사를 매년 11월30일까지 마쳐야 하고 그러지 못했을 경우 그 다음 날(12월1일)에 본회의에 부의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여야가 법안 심사를 정해진 시한까지 마무리 하지 못하더라도 예산안과 세입예산안 부수법률안이 1일 0시를 기해 자동으로 국회 본회의에 부의된다는 소리다.
예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법도 마찬가지다. 본회의 자동부의 제도가 없다고 가정하면 세법을 심사하는 조세소위원회를 거쳐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되며, 이후 법사위가 12월2일 전 심의의결을 마치면 의장의 직권상정 없이 충실한 심의를 거친 법안이 상정되게 된다.
문제는 올해 세법심의 과정에서 상임위의 역할이 충분하지 못하면서 제도에 오류가 생겨났다. 실제 지난달 30일 정부원안을 그대로 본회의에 상정하기를 원하는 여당의 고자세에 야당이 반발하면서 조세소위, 법사위 일정 모두 줄줄이 파행됐다.
결과적으로 여야 모두 법안 심의 시간에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법안을 심사해야 할 논의테이블은 상임위가 아닌 지도부로 넘어갔으며, 예산안 처리 몇 시간을 앞두고 지도부 간의 의견 조율로 일부를 제외하곤 예산안 및 예산부수법안들이 가까스로 통과됐다.
법안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상임위의 기능은 이 난리통에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 졸속의 결과물, '부작용' 소지 남겼다 = 졸속 심의는 결국 부작용의 소지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세법개정안 심사 막판까지도 여야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올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을 들 수 있다. 상증법은 상임위의 충분한 검토가 아닌 여야 지도부간 '숫자 맞추기식'으로 재생산된 법안(수정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이 같은 법안이 의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설 것이라는 기대는 만무했다.
결국 지도부 간 통과시키기로 합의됐던 사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야당을 비롯해 여당에서도 대거 '이탈표'가 생기면서 부결되고 말았다. 수정동의안이 부결되자, 원안 또한 세부내용에 상관없이 부결되는 희대의 촌극이 빚어졌다.
문제는 그 이후다. 역외탈세를 방지하겠다는 취지로 추진한 '거주자 판정기준 완화(1년→183일)'하는 내용의 소득세법은 통과된 반면,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상증법이 부결됨에 따라 조세정책에 엇박자가 발생했다.
실제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하며 소득을 낸 검은머리 외국인이 국내에서 사망했을 경우 소득세법을 적용해 국내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상증법상으로는 거주자에 해당하지 않아 그가 해외로 빼돌린 자산에 대한 상속세 등을 한 푼도 부과할 수가 없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가업승계 과세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10년 이상 경영에서 5년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부결된 상증법에도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업승계 지원도 반쪽자리 정책으로 운용될 위기에 처했다.
더욱이 세법심의 과정에서 합의된 사안도 국회에서 틀어진 모습이 다반사.
지난해 민주통합당이 제안한 소득세 최고세율(38%)이 적용되는 과표구간을 기존 3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내리는 소득세법 개정안 수정법안은 표결결과 부결 처리됐다. 여야 간 통과시키기로 합의된 사안이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딴판'이었던 것이다.
또 2006년에는 근로장려세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조특법 개정안이 부결된 바 있다. 재경위(현 기재위) 조세소위, 전체회의, 법사위 등 심의과정을 거친 사안이었다.
□ 후진적 세법개정, 세제실은 시중(?) 역할 = 정부는 올해 세법개정안을 발표하면서 핵심 키워드로 가계소득을 늘리겠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그 중심에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가계소득·배당소득증대세제, 기업소득환류세제)'를 배치했다.
하지만 제도의 목적과는 달리 우려 섞인 전망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기업투자를 위축시킬 것이다", "부자감세다", "실질적으로 근로자들의 임금증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된 것이다.
국회 세법심의 과정에서도 쟁점법안으로 분류시켰을 정도로 여야 간 의견조율이 쉽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제도의 추진에 있어 부정적인 요소가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제도손질이 불가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3대 패키지 법안은 정부원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했다.
담뱃값 인상도 마찬가지.
부자증세 없이 담뱃값을 인상해 서민부담을 가중시키는 지방세법개정안을 부수법안에 포함시킨 국회의 행태는 국민적 반감이 야기될 수밖에 없는 노릇. 담뱃값 2000원 인상 시 당초 목적인 금연효과는 이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반면, 세수는 한 해에만 2조원 이상이 걷힌다는 연구결과가 곳곳에서 나왔다.
결국 정책수요자인 국민들의 입장은 묵살당한 꼴이 됐다. 서민들 주머니에서 세금을 더 뺏어가겠다는 행위에 대한 반발도 잠시, 활활 타오른 여론이 식어갈 무렵 국회에서 가공된 정책은 국민들 앞에 날 것 그대로를 선 보이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정책생산자인 정부도 정치권의 '장단'에 편승해 이익만 챙기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계소득 증대세제, 담뱃값 인상 등과 관련한 여론에 철저히 귀를 닫고 '마이웨이'를 선택한 정부는 국회선진화법에 따른 졸속 세법심의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제대로 된 대응도 못한 채 정치권에게 뒤통수를 맞은 경우도 있다.
지난 2011년말 '한국판 버핏세'라고 지칭되는 소득세법 개정안(과표구간 3억원 신설)이 통과됐다. 정부는 회기기간동안 국회의원들을 설득하고자 뛰어다녔을 정도로 입법을 강력하게 반대해 왔다. 하지만 법안은 순식간에 통과됐고 정부는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한 정부 세법개정안도 산적해 있는 상태다. 정부에서는 이달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의원발의 형태로 법안을 상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사실상 폐기처분을 받았지만, 기존 내용에서 별다른 손질 없이 추진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의회 회기 중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안건으로 올리지 못한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편법으로 피해가야 하는 궁색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기획취재팀 : 이희정, 이현재, 강상엽, 류성철, 우선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