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수만 잘살 뿐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는 국가에 머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정한 기회를 누리고, 공정한 이익을 나눠 갖는 경제 체제를 만들 수도 있다. 이제는 아래부터 위까지 같은 규칙을 적용해야 할 때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발표한 국정연설을 통해 이 같이 말했다. 이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공정'(fairness)과 '평등'(equality)이란 단어를 수차례 언급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연간 100만달러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고소득자는 최소한 (소득의)30%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며 "한 해 소득이 25만달러 미만인 98%의 미국 가정에는 세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국가 수장이 공평 과세를 실현하고자 고소득층 부자들에게 보다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이른바 '부자증세'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증세를 언급하고 나선 데에는 세계적 주식부자 워런 버핏에게 적용되는 '자본이득세'(Capital Gains Tax) 세율이 그의 비서에게 부과되는 소득세율보다 낮은 미국의 뒤틀린 소득세 체계를 전면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부자증세 방안은 오는 11월 치러질 미국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내놓은 대표적인 공약이자, 승리를 위한 '카드'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권에도 오는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두고 서민·중산층 표심 공략을 위해 부자증세 카드를 앞다퉈 꺼내들고 있다. 정치권은 부자들에 대한 공세를 거창한 '조세정의(租稅正義) 확립'으로 포장해 내놓고 있다.
정치권이 노리는 부자증세의 근본적 목표는 복지재원 확충. 보편적 복지 또는 생애 단계별 맞춤형 복지 등 서민복지 확대를 추진 중인 여·야 모두 정책 시행을 위한 재원 확충 방안은 필수이며, 가장 손쉬운 재원 마련 방법이기도 한 증세를 선택한 모습이다.
정치권은 이미 지난해 12월31일 '한국판 버핏세'라고 불리는 고소득층 소득세율 인상안을 통과시키며 부자증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바 있다.
국민들의 의식 속에 '부자증세=조세정의 확립' 등식을 확고히 주입하고 있는 것이다. 여·야 구분이 없는, 정치권의 이 같은 움직임은 상당한 선전효과를 내고 있다.
1%를 포기하고 99%를 잡겠다는 것은 표에 생사(生死)가 갈리는 정치권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선전효과의 이면에는 과연 부자증세를 조세정의 확립과 일치시킬 수 있느냐는 의문점이 여전히 남아있다.
□ 한국 소득세율 '38%', OECD 26위 수준 = 부자증세와 관련해 정치권이 가장 먼저 주목하고 현실화를 추진한 부분은 '소득세'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은 OECD 회원국들과 비교해 다소 낮은 편이다.
지난 2010년 기준 OECD 34개 회원국 소득세율을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지방소득세 포함 38.5%로 26위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소득세 최고세율이 38%로 인상돼 지방소득세 포함 개인 소득세율이 42%에 육박하지만, 여전히 20위권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스웨덴(56.6%), 덴마크(52.2%), 핀란드(49%) 등 북유럽 사회복지 국가들은 물론 지방세 포함 개인 소득세율이 50%에 육박하는 일본과 영국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다.
OECD 선진국들에 비해 고소득층에게 적용되는 소득세 최고세율이 낮으므로 세율 인상 등을 통해 부자증세를 실시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통계다.
특히 국내총생산(GDP)에서 소득세가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경우 우리나라의 소득세율을 인상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기가 애매해지는 측면이 있다.
한국의 GDP 대비 개인 소득세 비율은 3.6%에 불과하며, OECD 회원국 중 슬로바키아(2.3%)에 이어 꼴찌에서 2번째다.
우리나라 소득세 구조가 개인들이 얻은 소득에 합당한 세금을 부과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수치에만 기댄 해석에 불과하다. 실제 납세자들이 느끼는 세부담 체감도는 분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수치적 측면만 놓고 볼 때 조세정의를 위해 부자증세를 해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상위 2% 부자들, 소득세 총액 58% 부담…"낼 만큼은 낸다(?)" = 최근 국세청이 발표한 '2011년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올해부터 38%의 최고세율을 적용받는 소득세 과세표준 3억원 이상의 부자들은 전체 납세자의 1.9%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난 2010년 기준 과세표준 3억원 이상 고소득자들에게 부과된 소득세는 총 3조3299억1900만원으로 전체 소득세 결정세액의 57.8%에 달한다.
소득 상위 2%의 부자들이 우리나라에서 과세되는 소득세의 절반 이상을 부담하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지난 2009년 기준 소득상위 10% 부자들에게 과세된 소득세는 약 10조원가량으로 전체 소득세 부과액의 85.5%에 이른다.
우리나라 부자들도 결코 적지 않은 액수의 소득세를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부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소득세를 부담하고 있는데도 우리나라 GDP 대비 소득세액 비율이 적은 이유는 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는 면세점 이하 납세자들이 많고, 포착되지 않는 세원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면세점 이하로 소득세를 전혀 납부하지 않는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40%에 달하며, 자영업자 중 42%도 면세 대상이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조세부과의 원칙을 적용받지 않는 예외적인 납세자들이 너무 많은 상황인 것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부담하는 소득세는 전체 세수의 42% 이상"이라며 "미국의 경우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세의 약 30%를 부담하는 것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는 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는 면세점 이하 국민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라며 "자영업자 과표 양성화를 위해 도입된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를 폐지하는 등 비과세·감면 혜택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정치권 조세정의 외치며 부자증세 추진, Why? =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만 해도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에서 복지재원 확충 및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 각종 비과세·감면 혜택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민주통합당의 경우 지난해 8월 '보편적 복지 재원조달 방안'을 발표하며, 이미 지원 목적이 달성됐거나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로 세제혜택 타당성이 낮은 비과세·감면 제도를 정비해 복지재원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소득세 및 법인세 감세를 철회하고 음성탈루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놨지만, 소득세 증세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은 없었다.
한나라당도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소득세 및 법인세 감세를 주장하며, 오는 2013년 국가 균형재정 달성을 위해 각종 비과세·감면도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계속된 부자감세 논란에 이어 지난해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연거푸 참패하며 복지 논쟁에서 뒤쳐진 한나라당은 '한국판 버핏세' 도입까지 추진하는 등 세제정책의 방향타를 부자증세로 탈바꿈했다.
이와 관련해 한 조세전문가는 "표심을 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마련한 복지정책 확대 공약을 뒷받침해줄 재원확충 방안은 필요하다"며 "하지만 선거가 다가올수록 정치인들이 기존 혜택을 빼앗는 비과세·감면 정비를 입에 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들이 '증세'를 언급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에 속한다"며 "다만 국민 대대수가 아닌 부유층과 같은 소수계층에 대한 증세는 표심을 끌어들이는 데 효과를 낼 수 있다. 현재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좋지 않다는 점도 (부자증세를 언급하기에는)분명한 호재다"라고 설명했다.
기획취재팀 : 김진영 정책팀장, 유엄식, 장은석, 이희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