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지오코리아와 관세청의 2000억원 세금전쟁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조세심판원이 디아지오코리아가 제기한 관련 조세불복에 대해 재조사 결정을 내렸기 때문. 세관이 디아지오코리아에 적용한 과세가격 산정방법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다. 심판원은 세관이 디아지오코리아로부터 추가 원가자료를 제출 받아, 과세가격을 재조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주류업체 디아지오 그룹의 국내 자회사 디아지오코리아와 관세청이 벌이고 있는 2000억원 세금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달 조세심판원이 디아지오코리아가 제기한 심판청구에 대해 '재조사' 결정을 내렸기 때문.
오랜 기간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던 양측 모두에게 실망감을 안겨준 다소 맥빠지는(?) 판정이지만, 심판원이 약 200억원에 달하는 가산세 부과처분에 대해서만큼은 부당하다는 결정을 내려 디아지오코리아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심판원의 이번 재조사 결정을 놓고 당사자인 관세청은 물론 민간 관세전문가들 사이에서 '책임회피성' 결정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심판원이 이번 과세불복의 쟁점인 수입가격 저가신고 여부를 놓고 숙성비용 및 과세가격 산정방식 적정성 등에 대한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자, 재조사를 통해 당사자간 과세금액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특히 사상 최대 규모의 과세불복인 만큼 이번 심판원 결정에 전관예우·외교압력 등 '보이지 않는 손'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미확인 설(說)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 심판원 "관세청, 추가자료 받아 재조사 실시해야" = 심판원은 결정문을 통해 관세청이 디아지오코리아에 적용한 과세가격 산정방법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 2009년 서울세관이 새롭게 적용한 '합리적 기준에 따른 과세가격 산정방식'이 그동안 디아지오코리아가 적용해 왔던 수입가격 계산방식보다 현행 관세법상 적용순위에서 밀린다는 이유다.
현행 관세법에 따르면 수입물품 과세가격 산정방법은 ①해당물품 거래가격 ②동종·동질물품 거래가격 ③유사물품 거래가격 ④국내 판매가격 ⑤원자재비용·이윤 기초 산정가격 ⑥기타 합리적 기준 등이며, 각 방법들을 반드시 '순차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디아지오코리아의 경우 2004년 이후 위스키 등 수입물품에 대해 원가 및 통상적인 이윤을 기초로 과세가격을 산정하는 ⑤번 방법을 고수해왔다.
서울세관이 지난 2004년 회사에 대한 최초 심사를 실시할 당시 ⑤번 방법을 적용한 바 있어, 이후 세관이 제시한 방법대로 위스키 수입가격을 신고해온 것.
서울세관은 2008년 실시한 재심사를 통해 숙성비용 등 제품원가의 상당부분이 수입신고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약 2064억원의 세금을 과세했을 때도 여전히 ⑤번 방법을 적용했다.
하지만 서울세관은 지난 2009년 디아지오코리아가 과세전 적부심사를 제기하자 자체적으로 재조사를 결정,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유사물품 거래가격을 기초로 과세가격을 산정하는 ⑥-3번 방법으로 갑작스럽게 수입가격 계산방식을 변경, 1941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⑥-3번 방법은 디아지오코리아가 적용해왔던 ⑤번 방법보다 관세법상 후순위 과세가격 산정방법으로, ⑤번 방법 적용이 불가능할 경우에만 사용해야 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이에 심판원은 결정문을 통해 "현행 관세법상 서울세관이 적용한 ⑥-3번 방법은 다른 방법들로 과세가격을 결정할 수 없을 때 적용하는 방법"이라며 "서울세관은 회사로부터 추가 자료를 제출 받아 재조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 관세청, "원가자료 안 주는데, 어떻게 조사하나..." = 심판원 결정과 같이 서울세관이 내놓은 ⑥-3번 방법은 디아지오코리아가 적용해온 ⑤번 방법에 비해 확실히 과세가격 산정방법 적용순위에서 밀린다.
서울세관이 마지막 카드를 너무 쉽게 꺼내든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서울세관은 ⑤번 방법 적용이 사실상 불가능해 다음 순번인 ⑥번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
서울세관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디아지오코리아가 2064억원의 세금 부과처분에 대해 과세전 적부심사를 청구하자 자체적으로 재조사를 결정했고, ⑤번 방법을 계속 적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원가비용을 기초로 수입가격을 계산해야하는 ⑤번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원가자료의 상당부분을 회사측이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충분한 원가자료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세관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에 세관은 합리적 기준에 따른 수입가격 계산방법(⑥번)으로 과세가격 산정방식을 전격 변경했고, 그중 유사물품 거래 가격을 기초로 과세가격을 산정하는 ⑥-3번 방법을 적용해 1941억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과세전적부심사 이후에도 2000억원에 달하는 세금부과액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자 디아지오코리아는 즉시 불복을 제기했고, 뒤늦게 심판원 측에 서울세관이 요청하는 자료를 영국 본사와 최대한 협조해 제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 200억원 가산세 부과 '철회', 디아지오코리아 판정승(?) = 한편 심판원은 2000억원 과세처분의 1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가산세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렸다.
관세청이 기존에 적용했던 ⑤번 방법으로 과세가격을 산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회사측에 가산세를 부과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못박은 것.
과세가격 산정방식을 ⑥-3번 방법으로 갑작스럽게 변경한 세관측이 ⑤번 방법을 지속적으로 적용해왔던 디아지오코리아에 신고불성실을 이유로 가산세까지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다.
심판원은 "디아지오코리아는 2004년 서울세관 심사 이후 세관 지시대로 ⑤번 방법을 사용해왔으므로 2009년 적용된 ⑥-3번 방법으로 수입신고할 수 없었다"며 "과세가격 산정방법 자체를 바꿔 과세하면서 신고불성실에 대한 과태료 성격을 갖는 가산세까지 부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심판원이 과세불복 3년 만에 재조사 결정을 내리자, 책임회피성 결정이 아니냐는 등 여러 가지 뒷말이 양산되고 있다. 특히 이번 심판청구 업무를 맡은 국내유명 법무법인의 경우 서울세관이 디아지오코리아에 2000억원대 세금을 부과할 당시 관세청 차장직을 지낸 S씨가 근무하고 있어 '전관예우' 논란까지 가세한 모양세다.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의 '외교압력'이 가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 3년 만에 내린 재조사 결정…전문가들 '갸웃' = 심판원이 약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두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재조사'에 머물자, 당사자인 관세청은 물론 민간 관세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심판원이 숙성비용 포함여부 및 과세가격 산정방식 적정성 등 쟁점사항에 대한 확실한 판정을 내리기가 어렵게 되자, 책임회피성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원은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심리를 거쳤고, 최고의사결정체인 합동회의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책임회피성 결정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는 것.
지난 2008년부터 디아지오코리아의 수입가격 저가신고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실시해온 관세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회사측이 원가자료 요청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견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방법까지 적용한 마당에 또 다시 재조사를 하라는 심판원의 결정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심판원 결정을 놓고 민간 관세전문가들의 반응도 관세청과 별반 다르지 않다.
관세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디아지오코리아도 어느 정도 수입가격 저가신고를 인정하고 있으며 2000억원에 달하는 세금 부과액을 조금이라도 깎아보려는 의도로 심판청구를 제기했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즉 유사물품 가격을 기준으로 수입가격을 계산하는 ⑥-3번 방법 대신, 추가적인 원가자료를 제출하고 다시 ⑤번 방법을 적용해 세금 부과액을 지금보다 더 낮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설명인 셈이다.
이에 한 관세전문가는 "숙성비용 등 원가산정을 놓고 디아지오코리아와 관세청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제3자인 원가산정 전문업체의 공증을 받아 객관적인 수입가격을 계산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전관예우, 외교압력…'미확인 설(說)' 난무 = 이번 심판원 결정과 관련해 최근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위공직자 전관예우 및 영국 정부의 외교압력 등 '보이지 않는 손'이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설까지 난무하고 있다.
특히 디아지오코리아로부터 심판청구 자문·대행 업무를 수임한 국내 유명 법무법인에, 서울세관이 디아지오코리아에 세금을 과세하던 당시(2009년) 관세청 차장을 지낸 전직 고위공직자가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관예우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영국 정부가 우리나라 정부측에 상당한 외교압력을 행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관세청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블레어 총리 집권 당시 터키에 진출한 디아지오 자회사가 탈세 혐의로 거액의 세금을 부과 받고 관계자들이 구속 조치되자, 터키 정부에 영국자본 철수 등 강력한 통상압력을 가해 양국 간 외교마찰을 일으킨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