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4.0'과 '상생(相生) 3.0'

자본주의도 컴퓨터 소프트웨어처럼 1.0에서 2.0, 3.0으로 계속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것인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고 개선된 버전 '자본주의 4.0'이 그 대안(代案)으로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이자 시사주간지 타임의 한 에디터 아나톨 카레츠키(Anatole Kaletsky)는 최근 '자본주의 4.0: 위기와의 씨름 중 새 경제 탄생(Capitalism 4.0: The Birth of a New Economy in the Aftermath of Crisis)'이란 저서를 통해 자본주의 진화과정을 소프트웨어 뉴 버전 출시에 비유하며 자본주의 진로 찾기를 시도했다.

자본주의 버전은 정부와 시장과의 관계,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자유방임의 전형적인 고전 자본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버전 1.0'으로 본다면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이 일상화된 시기가 버전 2.0에 해당한다. 버전 2.0은 정부의 문제해결능력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정부개입의 정도에 따라 2.1, 2.2... 식의 버전도 가능하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으면서 정부개입을 불신하고 시장의 자율을 주창한 자유시장자본주의 시기가 버전 3.0이다.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바로 정부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레이건과 대처의 '시장 근본주의'가 경제의 세계화와 맞물리면서 100년 만에 있을까 말까 하는 글로벌금융위기를 불러오기까지의 시기가 3.0에 해당한다.

따라서 탐욕과 과다(過多)를 다스리고 양극화 심화 등 세계화에 따른 부작용들을 극복하려면 거시경제 관리와 금융규제 등 몇몇 분야에서 정부가 적극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앞으로 이 실험기가 자본주의 버전 4.0이라는 얘기다.

복잡한 자본주의 진화과정을 버전 숫자놀음으로 도식화·단순화하는 데는 이견(異見)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 간의 관계를 준거 삼아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짚어내고 업그레이드 방향을 제시한 통찰력은 높이 사 줄만 하다.

금융위기 이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금융자본과 대기업들이 질타의 대상이 되고, 4.0이던, 다른 무엇이던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달라져야한다는 데는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도 '4.0 업그레이드' 실험에 들어섰다. 정부가 부자와 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연결고리 찾기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최선을 다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 그리고 큰 기업 작은 기업 할 것 없이 함께 잘사는 나라"를 강조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발전', '친(親)서민'이 키워드다.MB정부는 집권초기 수출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펴며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이 과정에서 내수위주 중소기업들이 소외되고, 대기업들의 실적은 크게 호전됐음에도 경제의 양극화현상은  도리어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거시경제 위주의 성장정책에 매몰되지 않고 서민과 중산층의 계층이동을 위한 부의 재분배와 교육기회 확충 쪽으로 국정운영의 전환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윈윈' 할 수 있는 방안으로 '상생 3.0'모델도 등장했다. 대기업이 관련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을 '상생 1.0' 모델로 본다면 대기업과 1차 중소협력업체가 함께 윈윈 하는 모델이 '상생 2.0'이다.

'상생 3.0'은 1차 협력업체 뿐만 아니라 2차, 3차 협력업체까지 상생구조 속에 들어오게 해 상생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이다.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자금지원 확대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협력업체의 기술개발을 지원하고 해외시장도 함께 개척해 상생을 체계화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산업구조는 소수의 대기업과 하청중소기업으로 고착화되어있다. 고용과 '산업의 허리'가 되어야 할 중견기업들이 신생 대기업으로 커나지 못하고 대기업 계열기업들의 독주 속에 만년 하청신세로 주저앉고 있다. 고착화된 산업구조에 역동성을 높이는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은 우리경제의 성장활력과 직결되는 과제다.

'친서민'정책은 MB정부가 간판으로 내건 지 1년이 지났지만 구호에 맴돌았다. 평소 입지 않던 점퍼를 입고 재래시장을 돌면서 사진 한번 찍는 쇼에 그쳤기 때문이다.

집권여당의 서민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준표 최고위원 스스로 "미소금융은 떼일 각오를 하고 해야 하는 데 자격을 엄격히 제한해 그 효과가 '언 발에 오줌 누기'이고, 보금자리주택은 로또주택이 됐고, 학자금대출은 고금리여서 대학졸업하고 10년을 허덕여야 한다"고 실토할 정도다.  

한나라당이 '친서민'을 내세워 7·28 재보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정부 여당의 친서민정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주거와 일자리 의료대책 등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현장냄새가 물씬거리는 정책들을 적극 개발한다고 기염이다. '친서민'정책들이 대거 쏟아질 판이다.

가난한 사람을 마음 아파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은 이념이 아닌 방법론의 문제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재정을 통해 도와줄 수도 있고, 시장에서 기업이 일자리 창출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는 경제여건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자본주의 4.0'은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중도실용 내지 '온정적 보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정부개입의 절제(節制)와 진정성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개입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 '상생'이 없는 대기업에 국책사업 참여를 배제시키는 등 압박은 할 수 있지만 기업들이 필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생태계를 구축하지 않는 한 효과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중소기업들의 기술개발능력을 키워 협상력을 높이고 홀로 설 수 있도록 연구개발지원을 정부가 돕는 것이 장기적인 해결책이다. 강압에 의한 '눈치보기' 상생, '면피성' 상생은 상생 아닌 공멸로 이끈다. 

'좌파 포퓰리즘'에 맞불 놓는 식의 '친서민'과 '상생'은 다음 대선을 의식한 선거의 정치이자 또 다른 우파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척'만 있고 진정성이 없는 '친서민 중도실용'은 '자본주의 4.0'도 '상생 3.0'도 아닌 인기 영합적 정치책략일 뿐이다.

서민과 중산층의 계층 간 이동통로 확대를 포함한 MB정부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의 '새 출발'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