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는 흔히 시스템위기로 불린다.개인의 잘못을 넘어서는 제도의 위기이고 시장의 실패와 정부실패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속에서 개인의 잘못된 정책적 판단이나 도덕적 해이를 가려내어 법적으로 책임을 묻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글로벌금융위기가 어느새 1년을 맞았다. 그동안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상각 처리한 손실액만 1조5000억 달러에 달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손실액이 4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법적으로 문책당해 구속되거나 실형을 받은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물론 금융회사들을 상대로 한 개인투자가들의 소송은 꾸준히 늘고 있다. 미국 연방검찰은 리먼브러더스와 AIG 워싱턴뮤추얼 등 25개사에 대한 공개조사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최근 아부다비상업은행이 무디스 와 S&P 등 신용평가회사와 모건스탠리를 상대로 낸 소송이 미국법원에서 기각된 것으로 미루어 법적 문책은 쉽지않아 보인다.
1990년대 공적자금 2400억 달러가 투입된 S&L(저축대부조합) 금융위기 당시 S&L 관계자 1852명이 기소되고 이 가운데 1072명이 실형을 언도받았다. 은행관계자들은 2558명이 구속됐다.
피해액 규모로 따져 이번 글로벌금융위기는 S&L 위기 때와 비교도 되지 않지만 이로 인해 벌금형 또는 징역형을 언도받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을 것이란 전망들이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금융거래의 내용자체가 고도로 복잡하고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거나 우회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돼 있다는 점이 첫째다. 문제가 된 파생상품거래들이 '법을 비켜갔을 뿐 법을 어기지는 않았다'(skirt, not break the law)는 얘기다.
이들 거래에 참여하는 당사자들 숫자가 국제적으로 엄청나고 이들이 2중 3중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complex financial deals)는 점이 둘째다.
이 복잡한 거래내역을 법원이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고 밝혀낸다고 해도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다는 점이 셋째다. 거래내역에 관한 지식과 정보가 한정돼 유죄로 옭아맨다는 보장이 없다.
파생상품세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법률도 알고 파생상품의 생리도 아는 특수전문가들이 있어야한다. 이혼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가정법원, 무역 분쟁을 다루는 무역법원 같은 특수금융법원이 없는 한 현재의 사법체계는 파생상품세계의 대항마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법률당국으로서는 실로 딜레마다. 여론이나 투자가 등 대중적 정서상 금융인이나 은행가들이 줄줄이 벌금형이나 징역형을 받을 법도 하지만 법의 제재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본보기로 어느 개인을 '마녀사냥'할 경우 더 큰 구조적 결함 등 금융위기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거나 오도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처벌을 하지않을 경우 잘못된 관행들의 시정을 법으로 강제하기가 어렵다. 국제결제은행의 건전성 규칙과 과다보너스 지급자제를 아무리 외쳐 본 들 현실적으로 '감옥 가는 것'만큼 겁을 먹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치가와 금융규제당국 입장에서 금융개혁이 잘 되고 있다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일도 난감해진다.
금융범죄는 원래 처벌과 기소가 어려운 범죄이고 손실을 얼버무리는 회계조작의 경우 투자가들에 대한 객관적인 손실액 측정은 지극히 어렵다. 지난 5월 600억 달러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극을 벌인 71세의 버나드 메이도프 전 나스닥증권거래소위원장에게 150년 징역형을 선고한 사례는 미국 사법당국의 고뇌를 극적으로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남은 기대수명의 몇 갑절 언도로 일반의 보복욕구를 충족시키고 동시에 금융범죄가 중죄라는 인식과 함께 강력한 단죄의지를 내보이며 예방효과를 노린 것이다.
금융위기와 부실문책은 황영기 KB금융지주회장(전 우리은행장)에 대한 금융감독당국의 중징계로 한국에도 그 불똥이 튀고 있다. 우리은행이 파생상품투자로 입은 1조6000억원 손실의 책임은 누가 져야하며 은행장 책임은 어디까지 물어야 하나. 파생상품 투자를 독려한 정부당국, 그리고 은행의 건전성을 감독해야 할 은행감독당국에는 책임이 없는가. 경영상 판단에 따른 결과에 대해 사후적으로 문책하는 것이 합당한 가.
파생상품시장은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며 거래하는 고위험 고수익시장이다. 시장 자체가 제대로 발달되지 않고 감독체계도 미흡한 현실에서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일은 쉽지가 않다.
당시는 우리금융권이 다투어 대형투자은행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고, 세계의 신용평가 회사들이 최고등급을 매긴 부채담보부증권(CDO)과 신용부도스와프(CDS)에 주로 투자했기 때문에 무모한 투자로 몰아치는 것도 무리다.
금융상품의 특성을 외면하고 결과만 가지고 처벌한다면 시장자체가 위축될 수도 있다. 징계에 맞서 법적대응을 하는 경우 법적 판단 역시 우리 사법계의 현실에서 간단치가 않다.
엄청난 국민혈세를 축낸 마당에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어느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 식 문책은 경계해야한다. 본인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나는 길도 하나의 해결방안이다.
파생상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우리 모두가 바친 수업료가 어디 이 뿐인가. 소모적인 논란들을 접고 은행의 투자행태와 위험관리, 그리고 감독당국의 역할과 책임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 : 동아일보 경제부기자,워싱턴특파원. 중앙일보 워싱턴주재 부국장, 경제담당부국장, 편집국장 대리, 논설위원·고문 역임. 고대, 서강대, 외대 언론대학원 초빙교수. 조세일보 논설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