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4억 메모'로 시작된 '노태우 비자금' 의혹…수사 언제 이뤄지나

올해 국감서 김옥숙 여사 210억 차명보험 납부, 동아시아문화센터 상속증여세 회피,
차명 부동산투자회사 통한 비자금 은닉 정황, 비거주지 과세제도 등 의혹 제기

강민수 국세청장 "3심서 확정돼야 움직여"…심우정 검찰총장 "법리 검토중"

국회 법사위, 세차례 증인 채택에도 모두 불출석한 노소영·노재헌 고발 검토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드러난 이른바 '노태우 비자금' 의혹에 대해 진실 규명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1997년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한 대법원 판결로부터 28년, 추징금 완납 후 11년 만인 올해 정치권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환수를 위한 법안이 발의되고 법제사법위원회와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새로운 비자금 의혹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소송에서 밝혀진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904억 메모와 152억 재단 기부 외에 김 여사의 210억 차명보험 납부, 동아시아문화센터의 비정상적인 공시 및 상속증여세 회피 의혹, 차명 부동산투자회사를 통한 비자금 은닉 정황, 비거주지 과세제도와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역외탈세 등이 거론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은 8일 국정감사에서 김 여사가 2000~2001년 차명으로 보험료 210억 납부한 사실을 알고서도 검찰과 국세청이 확인서만 받고 조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김 여사가 1998년 904억원 메모를 작성한 직후이며, 더는 돈이 없다고 호소하며 추징금 884억원을 미납한 시기였다.

민주당 김영환 의원은 16일 국회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공시 결산서류 조작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김 여사가 동아시아문화센터에 95억 원을 기부한 2020년 결산서류 출연자 목록에 김 여사와 아들 노재헌 이사장의 관계가 '해당 없음'으로 표기되어 있고, 2023년 결산서류에 0원으로 표기됐던 기부금 잔액이 국감을 앞둔 지난 9월 20일 97억 원으로 수정되는 등 부실 관리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또 공익법인인 동아시아문화센터의 총자산 222억 원 중 공익사업 지출비용은 8000만 원으로 자산 대비 0.3%에 그쳤는데, 대부분의 자산이 고가의 부동산과 금융투자 사업 등인 점을 근거로 제시하며 상속 증여세 포탈 의혹도 불거졌다.

국회 법사위 간사인 민주당 김승원 의원은 24일 보도자료를 통해 국세청 홈택스 및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을 분석한 결과 노 이사장이 측근 명의의 부동산 임대·매매업 주식회사 '네오트라이톤'의 지분 60%를 보유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노 전 대통령 일가가 비자금 은닉을 위해 차명 부동산 회사를 운영 중인 정황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네오트라이톤은 2017∼2021년 서울 용산구의 주택을 104억2000만원, 2017년 강남구 청담동 건물·토지를 57억원에 각각 매도했다. 김 의원은 이 회사가 은행 차입금과 함께 주주 2∼3인으로부터 무이자, 무담보로 수십억원을 대여받아 부동산 분양과 임대 사업을 벌여왔고, 감사보고서상 자본금이 1660만원에 불과한 점을 지적하며 회사 운영에 비자금이 사용됐다고 추정했다.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은 16일 국회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노 이사장이 '비거주자' 신분을 악용해 지능적으로 세금을 회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거주자는 최근 3년 동안 국내 체류 기간이 183일이 안 되는 개인을 말하는데, 이 경우 소득세를 내지 않고 해외 금융거래를 신고하지 않아도 돼 소득·자산 은닉과 탈세에 악용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민수 국세청장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대법원 판결까지 끝나야 세무 당국이 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 국세청장은 같은 날 기재위 국정감사에서 "사실관계 부분이 3심에서 확정돼야 (국세청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21일 열린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관련 고발장이 3건이 들어왔으며, 수사팀에서 관련된 법리나 여러가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수사를 촉구하는 시민단체 등의 고발도 이어지고 있다. 시민단체 군사정권범죄수익국고환수추진위원회는 범죄수익은닉 및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검찰 고발한 데 이어 14일 "불법증여 문제가 발견됐다"며 노 관장을 국세청에 고발했다.

5·18기념재단도 같은 날 조세범처벌법·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김 여사, 노 관장, 노 이사장을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이들은 "은닉한 비자금이 총 1천266억 원대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된 노 관장과 노 이사장은 세 차례의 출석 요구에도 18일, 21일, 25일 모두 불출석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두 사람에 대해 고발 조치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