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 前 국세청장이 퇴임식을 한 날은 공식적으로 지난 1월 19일이다. 오는 5월 20일이면 국세청장 자리가 공석으로 유지된 지 꼬박 넉 달째가 된다.
국세행정의 총책임자인 국세청장 자리가 사상 최장기간 '직무대행' 체제로 유지되면서 청와대와 국세청 안팎에서는 온갖 뒷말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뒷말의 지향점은 하나다.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세청장을 인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청와대가 새로운 국세청장을 지명한다해도 인사청문회 등 임명절차에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하면 6월 초순은 되어야 국세청장으로서 공식업무를 수행할 수가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 '국세청장 지명',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와 파장은 상당하다.
일단 흔들리는 국세청 조직을 바로잡고 현재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고 있는 국세청 조직개편 작업의 방향타를 쥘 실질적인 구심점이 확보된다. 그 동안 국세청장 인선을 둘러싸고 생겨났던 각종 루머와 청와대 직무유기 논란 등을 단번에 잠재울 수가 있다.
현재까지 청와대는 국세청장 인선에 대한 명확한 '지침'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왜 국세청장 인선을 청와대가 지연시키고 있는 것일까.
청와대 안팎에서는 '인물난' 등을 은근슬쩍 인선지연의 이유로 내밀고 있지만 국세청 안팎에서는 확실히 납득이 갈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 넉 달째 후임자 물색…"할 만한 사람 없다?"= 지난 넉 달 동안 자천 타천으로 거명된 국세청장 후보자는 십 여명이 넘지만 청와대는 '인물난(人物難)'을 인선지연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꼽고 있는 모습이다.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국세청 조직 특성상 조세행정 업무에 대한 식견이 있으면서도 조직논리에 휘둘리지 않을 인물이어야 하는 데다, 시기적으로 개혁성과 함께 청렴성, 도덕성이 겸비돼야 하는 그야말로 '만점'짜리 인물이어야 하기 때문.
그러나 자천이든 타천이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후보군을 쏟아내며 소비한 시간을 감안하면 청와대가 마냥 인물난 때문에 인선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내세우고 있는 인물난을 "정권을 비호할 최일선 파수꾼이 될 인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군사정권 시절 국세청장 인선과 연결 지은 '삐딱한'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는 자천 타천으로 거론됐던 십 수명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 청와대가 인물난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이들 후보군들이 지난 4개월 간 진행된 청와대의 치밀한 검증과정에서 모두 '퇴짜'를 맞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국세청장으로 거론됐던 인물 중 일부는 능력, 청렴성, 개혁성 등 이명박 정부의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 중 일부에 심각한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동안 거론됐던 다수의 후보군 중 몇 몇은 여전히 가능성을 유지하며 후보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청와대 안팎의 중론이다. 무려 넉 달 동안이나 찾지 못했다는 적합한 인물이 한 순간 '툭'하고 튀어나올 가능성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 '지역안배'에 대한 고민= 청와대의 새로운 국세청장 인선에는 '지역안배'라는 고려요소가 있다. 대한민국 공직자들은 단순히 능력만 가지고는 고위직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정설. 때에 따라서는 지역안배가 능력에 우선한 인선기준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세청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과 함께 4대 권력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 권력기관의 수장 인선에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지역안배 문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지역안배 문제는 정치적 색채가 강한 인선기준이다.
지난 1월 청와대는 현 정권의 주류로 일컬어지는 TK(대구·경북)인사들을 국가정보원장(원세훈), 경찰청장(강희락)에 임명했다.
당시 유임됐던 임채진 검찰총장이 PK(부산·경남)인사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세청장 자리는 다른 지역 출신 인사에게 배정되어야 권력기관간 지역안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넉 달이 지난 현재에도 이 같은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으나 국세청 안팎에서는 청와대가 이 같은 지역안배를 감안하지 않는 '파격적 인선(TK인사)'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청와대가 말하고 있는 인물난의 의미에는 단순히 국세청장 직위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여하와 더불어 지역안배도 연계되어 있다는 분석이 많다. 다시 말해 '능력과 지역적 색채도 갖춘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아 인선이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인 셈이다.
다만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지역안배 문제는 복잡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오는 10월 임채진 검찰총장의 임기가 만료되기 때문이다. 현재 검찰 주변에서는 차기 검찰총장에 TK인사가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따라서 후임 검찰총장 인선은 새로운 국세청장 인선의 분명한 '변수'라는 것이 국세청 안팎의 시각. 현 시점에서 어떤 인물을 국세청장에 앉히느냐의 문제는 향후 검찰총장 인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 박연차 수사…'정치적 부담'이 인선 가로막아(?)= 그러나 일각에서는 권력기관장 인선에서 지역안배문제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권력의 생리를 감안할 때 외형적인 문제에 불과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정권의 '날개'라고 할 수 있는 권력기관장과 같은 핵심직위에는 자신의 오른팔이 될 사람을 앉혀 놓고 싶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겉으로 고민을 거듭하고는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보여준 인사스타일을 감안하면 지역안배에 대한 고민은 이번 국세청장 인선 고려요인에서 사실상 배제되어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면 사람 한 명을 고르는데 넉 달이 넘는 긴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사건이 국세청장 인선을 지연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당초 박연차 회장 개인비리로 출발했던 검찰조사는 노무현 정부의 핵심실세부터 전·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줄소환'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지난 4월 재보선 직전 노 前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직접적인 타깃이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가져왔다.
특히 검찰수사에 앞서 실시된 태광실업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당시 총책임자였던 한상률 前국세청장은 물론 전·현직 국세청 고위간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다시 말해 국세청은 여전히 이 사건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는 셈이다.
이에 따라 정.관계 일각에서는 현 상황에서 박연차 로비사건의 핵심 실마리를 제공하는 등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국세청 수장의 인선을 지금 이 시기에 하는 것은 청와대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당장 국세청 조직안정 등 요인을 감안할 때 국세청장 인선이 급한 형국이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모든 의혹이 규명되는 시점에 청와대가 국세청장 인선을 단행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