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국민 속이고 숨겨온 노태우 비자금... 추징·엄벌이 '정의'

'어제의 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만약 범죄수익이 사회에 환원되지 않고, 범죄자의 자손들이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면. 범죄자와 그 자손들이 범죄수익으로 아무런 걱정없이 풍요로운 삶을 향유한다면 과연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런 세태를 보며 우리 사회는 카뮈의 말대로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 돌아볼 일이다.

조세일보가 지난 1월 6일부터 5회에 걸친 특집기사로 '노태우 비자금'을 점검해 본 결과 '국민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 천문학적 액수로 불어난 불법 비자금

지난해 세기의 이혼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은 천문학적 재산분할액(1조 3808억 원)으로 인해 엄청난 이슈가 된 바 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혼소송 2심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노태우 비자금' 의혹 때문이다.

그것도 노소영 등 그 가족들이 '당사자들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며, 30여년 국민을 속인 채 은닉해 오던 그 비자금을 공개했고, 담당 판사는 비자금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노태우 비자금은 지난 1997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은 후 2379억 원이 국고로 환수됐고, 16년 만인 2013년 미납 추징금 230억 원을 마저 내면서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 했다.

심지어 더 많은 불법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보이는 전두환의 경우 추징금 2205억 원 중 여전히 867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

전두환은 추징금에 대해 묻자 "자기 재산은 29만 원 뿐"이라며 전국민을 상대로 기만적인 모습마저 보였다.
한편 노 관장 측이 이혼소송 2심에서 유리한 증거라며 제시한 '김옥숙 여사의 메모'에서 드러난 비자금 규모는 약 904억 원 가량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10월 14일 김옥숙 여사와 노재헌, 노소영 씨 등을 '범죄수익은닉의 규제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검찰청에 고발하면서 "김옥숙 여사가 2000년부터 2001년까지 210억 원 가량의 비자금을 차명 보관하다가 보험금 납입 명목으로 자금을 세탁하고, 또 불법 비자금 152억 원을 노재헌씨의 공익재단(동아시아문화센터)에 기부해 불법 증여한 사실도 드러났으며, 은닉 비자금이 총 1266억 원대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 공익법인의 '탈'을 쓴 자금... 관리도 부실 투성이

노소영 씨가 운영하는 '아트센터 나비'의 경우에도 다양한 조세 혜택이 제공되는 공익법인으로 국세청을 통해 재무제표 등 자료 공시 의무가 있지만, 부실 자료 공시로 도마에 오르곤 했다.

무엇보다 매년 수억원의 정부보조금까지 받는 공익법인(아트센터 나비)의 공시번복이 수차례 반복되고, 회계법인의 외부감사를 거친 감사보고서와 공시된 결산서류의 재무제표가 불일치하는 사례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어 당국의 비호를 받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됐다.

국세청의 재검증 등 철저한 관리 감독이 요구되지만, 웬일인지 국세청의 움직임은 답답한 모습이다.

답답한 움직임은 국세청뿐이 아니다. 불법 비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법을 발의한 국회는 손을 놓고 있고, 노소영 등 비자금 은닉 당사자들을 엄벌해 달라는 고발장이 접수된 검찰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1997년 대법원의 '노태우 비자금 추징 및 국고 회수 판결'을 무시한 하급 법원도 있다.

국민은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노태우 노소영 비자금을 방관하거나 비호하고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 범죄수익 '방관' vs '단죄'... 무엇이 '정의'인가?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 우두머리'로 사형이 선고됐지만, 동서화합과 국민통합을 앞세운 김대중 대통령의 사면으로 단죄하지 못했다.

노태우와 노소영 등은 우리 사회의 관용을 악의적으로 이용해 '겉으로는 반납쇼'를 하면서 속으로는 비자금을 불법으로 은닉해 재산을 불리며 호위호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불법 은닉해 왔다고 밝혀진 액수만 1400여억원에 달한다.

그들은 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불법 정치자금을 거둬들여, 이른바 '통치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자금의 일부를 자신들의 가족과 자손들을 위해 쌈짓돈처럼 사금고에 저장해놓고 야금야금 빼쓰는 것은 아닌지 의혹을 받고 있다.

불법 자금, 범죄수익으로 의심되는 '노태우 비자금'이 그들 자손들에게 대를 이어 자금줄이 되고, 그 자금을 통해 배불리 살아가는 사회, 수많은 청년들이 취업난에 시달리고,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줄도산의 위험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과연 '정의'를 얘기할 수 있을까?

◆ 정부, 올해 '독립몰수제 도입'

이런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범죄수익에 대한 몰수'가 제도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 

불행한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런 역사가 다음번에는 희극적으로 재현된다는 역사적 통찰을 제시한 마르크스의 말이다.

다행히 법무부는 지난 14일 '2025년 주요 업무 추진계획'에서 "(범죄 피의자의) 사망, 도주 등 기소가 어려운 사안에서도 범죄수익을 환수할 수 있는 독립몰수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독립몰수제는 '범죄자를 특정하기 어렵거나, 해외 도피, 소재 불명, 사망 등으로 공소제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범죄수익이 특정됐다면 몰수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특히 그동안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례처럼 독립몰수제가 도입되더라도 그 가족이 불법 비자금임을 알고도 취득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으면 추징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고려해 박준태 국민의힘 의원 주도로 지난해 9월 발의된 일부개정법률안에는 "몰수 대상물을 제3자가 상속·증여·유증받은 경우 이를 알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연히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우리 헌법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법 앞의 평등'은 모든 국민에게 법적용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정의다.

범죄수익이 자손들의 재산 축적 수단이 되지 않도록 사회에 환원돼야 한다는 요청이 국민들의 눈높이고, 노태우-노소영 불법 비자금 역시 우리 헌법이 추구하는 '법 앞의 평등' 원칙의 예외가 돼서는 안된다.

개정안을 검토한 국회 관계자는 "몰수는 형식적으로는 형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물적 보안처분(장래 범죄 예방을 위한 제재)에 속한다는 견해가 학계의 다수설"이라며 "선의라 하더라도 범인의 재산을 그대로 포괄 승계한 상속, 유증, 유류분 취득자의 재산은 몰수·추징하는 것이 정의 관념에 부합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세무조사를 통해 '노태우 비자금'의 조세 포탈 부분을 재확인해야 할 국세청, 고발된 범죄수익에 대해 환수를 위한 수사를 진행해야 할 검찰, 두 국가기관은 지금껏 법 뒤의 무사안일에 숨어 직무유기를 한 것은 아닌지, '정의'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적극 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