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지역별 비례선발제, 나쁜 균형에서 벗어나는 시작점”

“경기 어려워지면 자신의 정부 임기내 가계부채 줄이기 보단 다음 정부로 미뤄”
 
“교육열에서 파생된 끝없는 수요, 강남 부동산 불패 신화 고착시킨 것”
 
“해 날 때 지붕을 고쳐야 하지만 우리는 기다려 구조개혁 추진할 여유 없어”
 
“다양성 도모, 부의 대물림 완화하고 능력에 따른 학생 선발이라는 관점에서도 낫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7일 "지역별 비례선발제는 정부 정책이나 법제도를 손대지 않더라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들이 결단만 해준다면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나쁜 균형에서 벗어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창용 총재는 이날 '지역균형발전 정책과 교육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 – 행정제도 및 입시제도 개편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서울대학교-한국은행 공동 심포지엄'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이 총재는 폐회사를 통해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최근에는 국가를 위한 싱크탱크(think tank)로서 우리가 직면한 장기 과제들도 연구하고 대응방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해 왔다"라며 "저출생 문제의 중요한 원인으로 여겨지는 수도권 집중과 입시경쟁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행이 장기 구조개혁 과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문제가 단기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우리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지난 수십년간 누증되어 오면서 이제는 통화정책, 재정정책 등 정부의 단기 거시정책의 선택을 제약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목요일 금리 결정이 그 좋은 예"라고 부연했다.

이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주 기준금리를 현 수준 3.5%에서 유지하는 결정을 내렸다"라며 "그런데 금통위 결정 이후 과연 금통위의 결정이 현 상황에서 옳은 결정이었는지 갑론을박도 있고 많은 분들이 의견을 제시해주셨다"라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논쟁이 현 상황에서의 최적 결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왜 우리가 지금 금리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높은 가계부채와 수도권 부동산 가격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4년 57% 수준에서 2021년까지는 거의 20년 동안 모든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해 왔다"라며 "가계부채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 자신의 정부 임기내에 가계부채를 줄이기 위한 노력보다는 다음 정부로 미루는 것이 편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라고 직격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가격도 마찬가지 예"라며 "수도권 부동산, 특히 강남 부동산에 대한 초과 수요가 상시 잠재해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그 수요의 근저에는 두 번째 세션에서 다룬 입시경쟁이 깊게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총재는 "입시경쟁이 치열해지고 사교육이 중요해지다 보니 자녀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면 서울로, 그리고 강남으로, 주택 구입이 어려우면 전세로라도 진입하고자 한다. 이후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또 다음 세대가 똑같은 목적으로 진입을 기다리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교육열에서 파생된 끝없는 수요가 강남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고착시킨 것"이라며 "이러한 구조적인 제약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단기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향으로 통화·재정정책을 수행한다면 부동산과 가계부채 문제는 지난 20년과 같이 나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해 날 때 지붕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 있다"라면서 "경제적으로 해석하면 경제가 좋을 때 가만히 있지 말고 어려운 구조조정을 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십년간 증가해온 가계부채, 반복되는 부동산 문제, 미진한 연금 및 노동개혁 등을 볼 때 우리는 해가 날 때도 구조조정을 하기보다는 손쉬운 재정 및 통화정책을 통해 임시방편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고통이 수반되는 구조조정은 미루어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라며 답답해 했다.

이 총재는 "더 안타까운 점은 이제 우리에게 해 날 때를 기다려 구조개혁을 추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라며 "전세계 최상위권 수준의 가계부채가 더 증가했다가는 조만간 수요부족으로 경제성장률을 낮추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높아진 수도권 부동산 가격도 국민들 간의 위화감, 나아가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는 수준"이라며 "지금은 태풍만 아니라면 날씨가 흐려도 지붕을 고쳐야 하는, 즉 단기 경제정책과 구조개혁을 함께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첫 번째 세션에서 고길곤 교수와 이진수 교수께서 지난 수십년간 이어온 수도권 집중에도 불구하고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나눠먹기식의 분산된 지원에 그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지역 행정체계를 거점도시의 발전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두 번째 세션에서 우리 연구진이 발표한 내용(수도권 집중에 대응한 거점도시 중심 균형발전, 지역별 비례선발제 도입)은 다소 파격적일수 있지만 저는 시도해 볼만한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교육 측면에서 우리 사회는 '나쁜 균형(bad equilibrium)'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며 "나쁜 균형에서 빠져나오려면 저자들이 제시한 파격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 중에서 서울 출신 비율(32%)은 서울의 학령인구 비율(16%)보다 두 배 높고, 특히 강남 3구의 경우 세 배(12%/4%)에 달한다"라며 "지금처럼 동질적인 학생들이 몰리는 것보다 다양성을 도모하는 것이 부의 대물림을 완화하고 능력에 따른 학생 선발이라는 관점에서도 낫다는 사실에 다들 동의하실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역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정책이 수월성 관점에서도 무리가 없다는 점은 저자들의 분석결과에서도 확인됐다"며 "지역균형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학업성과가 다른 학생들보다 전혀 뒤처지지 않는 것은 이 제도가 수월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반증"이라고 역설했다.

이 총재는 "이 제안은 정부 정책이나 법제도를 손대지 않더라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님들이 결단만 해주신다면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나쁜 균형에서 벗어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정부는 법을 바꾸지 않더라도 이를 지원해주고 더 많은 자율성만 부여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이어 "특정지역의 입학생 비율, 사실상 서울 또는 강남지역 입학생 비율이 학령인구 비율의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조정하는 정도로만 제도를 추진한다면 현재 학과별 선발제도의 틀을 유지하더라도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창용 총재는 "우리는 더 이상 해 날 때를 기다려 구조조정을 추진할 여유가 없고 고통을 인내하고 구조개혁을 실천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라며 "지금 우리 경제는 단기적인 재정·통화·거시건전성 정책을 통한 정부간의 정책 공조와 장기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입시제도 개편이 우리 아이들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는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라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교수님들의 결단으로 변화가 시작되어 대치동 학원들이 전국으로 분산되고, 지방의 중고등 학생이 입시를 위해 서울로 이주해올 필요가 없어지고, 매년 학기초가 되면 각 지역 고등학교의 입학 환영회 플래카드가 대학 정문에 걸리는 다양성이 확보된 대학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이창용 총재는 "이렇게 되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조정하는 것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을 더 효과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