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서 생긴 일

가로수가 노랗게 단풍으로 물들며 초록이 잊혀 갈 즈음이다. 시간을 가늠하기 힘든 어스름한 어느 늦은 오후였다. 지인 몇 사람과 어울려 동네를 거닐 때 저만치서 한 할머니가 유달리 가깝게 눈에 들어왔다. 요즘엔 좀체 경험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허리는 굽었고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종종걸음으로 걷다 쉬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언뜻언뜻 눈에 들어왔다. 힘겨워 보였다.

우리와 마주치자 가쁜 숨을 내몰아 쉬던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린다. "할머니, 어디 힘드신가 봐요?" "어, 조금 쉬었다 갔으면 하고……." 아파트 둘레길이다 보니 주변에 벤치가 있다. 안내한 곳에 다소 어색한 몸짓으로 자리를 잡는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주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리를 이리저리 살핀다. 할머니의 초조한 기색을 훔쳐봤다.

팔십 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걸을 때면 지면과 수평으로 굽은 듯한 체형이 안쓰럽고 손에 쥔 지팡이가 낯설어 보였지만, 조그마한 얼굴에 뽀얀 피부의 미색이 세월에 불구하고 여여(如如) 하다. 백발에 하얀 헤어밴드로 정갈함을 더했다. 모시 조끼 상의에 화이트칼라 바지의 옷맵시가 어스름한 가로수 아래에서도 또렷하다. 할머니의 얼굴은 '서리에 물든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 당나라 때 시인 두목의 「산행」 에서)'. 까만 눈동자는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한 눈망울(조지훈의 「승무」에서)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멋쟁이 할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눈빛 교환이 끝나고 다소 진정될 만큼의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가 먼저 아파트 아래 오래된 주택단지에 산다고 했다. 오후에 동네 케어 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왔더니, 문 앞에 '아파서 119구급차로 병원에 간다'라는 아들의 메모지가 놓여있었단다.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 아파트에서 200여ｍ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정말 효자라고도 했다.

우리의 어머니는 자식을 당신의 몸에서 낳았지만, 여전히 뱃속에 담고 산다. 아직도 탯줄을 끊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 산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이어령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에서 "네가 태어나는 날 나도 함께 이 세상에 태어났다. 네가 태어나는 순간 나도 아버지가 되었으니까"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들은요?" "이쪽 대학병원에는 아들 이름으로 입원한 환자가 없다고 하네……." "할머니, 핸드폰 있으세요?" "급히 나오다 보니 집에 두고 왔나 봐" "그럼 아드님 핸드폰 번호 아세요?" "아니, 내가 번호를 못 외워" 그러더니 할머니는 더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서두른다.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할머니"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엉거주춤한 몸을 곧추세우며 부산스럽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몇 발자국이나 뗐을까. 무슨 아쉬움이라도 남았는지 뒤돌아보며, "늙지 마소, 늙지 마소. 하고 싶은 거 하고 재미나게 살아" 하신다. 회한인 듯, 격려인 듯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곤 달팽이가 고개를 넘어가듯 서글픈 몸짓으로 저 너머 세상 속으로 사라져 가는 할머니…….'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 섰다.

그날 이후 할머니를 본 적은 없다.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궁금하기는 함께 있었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의 아들은 어떤 사람일까. 효자 아들은 무탈하겠지'라는 염려도 있었고 '도대체 엄마라는 이유로, 무슨 죄를 지었길래, 억울한 마음은 들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나 자식을 키우면서 즐거움과 안타까움을 운명처럼 하나씩 달고 살지 싶다. 기울어진 지구가 바로 서지 않는 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인가. 2천5백여 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고통과 놀랍게 연관되어 있고 하나를 취하면 늘 다른 한쪽도 취하게 되기 마련이다. 마치 그 둘이 한 머리에 붙어 있는 것처럼'(「파이돈」, 플라톤).

어느 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다. 그 흔한 성공에 관한 이야기 중에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었던 글귀를 발견했다. "인생의 궁극적 성공은 당신의 배우자가 해가 갈수록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배우자'는 온데간데없고 '자식'이 떠오른다. 삼십 대의 아들 둘을 둔, 아직 결혼도 취업도 못 한 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기란 쉽지 않으련만.

◆ 글쓴이 : 김종봉 세무법인 더택스 대표세무사
[약력] 현) 가천대학교 겸임교수 / 현) (사)대한바둑협회 임원(이사), 현)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모금분과실행위원회 위원, 서울청 국선세무대리인, 중부청 국세심사위원, 법무법인 율촌(조세그룹 팀장), 행정자치부 지방세정책포럼위원 / 가천대학교 경영학 박사 / 국립세무대학 총동문회 수석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