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법령에서 접대비실명제는 폐지됐지만, 접대문화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도록 제도개선이 꾸준히 이어졌다.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발전한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다 새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콩나물은 그 물을 먹고 자란다. 2004년부터 시행된 접대비실명제는 시행 5년 만에 폐지되었지만 우리 사회의 건강 씨앗이 되어 적지 않은 긍정적 효과를 남겼다.
우선 접대하는 기업 측이나 접대 받는 측 모두가 호화향락성 접대나 고액 접대를 꺼리면서 접대문화가 건전해졌다.
또한 접대비실명제가 정부기관의 업무추진비는 물론이고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공공기관의 업무추진비에 계속 적용되면서 건전 접대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처럼 접대비실명제에 영향을 받은 예산운용지침의 실명제 규정이 세법상 접대비실명제 폐지이후에도 계속 시행되면서 국민 세금이나 기업자금이 음성적인 접대나 개인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크게 축소되고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투명해지고 건강해지는 전기가 됐다.
또한 접대비실명제 규정 자체는 삭제되었지만, 대신에 세법령에서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이 어렵도록 제도가 보완되어갔다. 접대비실명제가 이런 제도 도입의 마중물 내지는 가교역할을 한 셈이다.
즉, 법인세법 제25조와 시행령 제41조에서는 3만원(경조금의 20만원)을 초과하는 접대비는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세금계산서, 원천징수영수증을 사용하여 지출하는 경우에만 비용(손금)으로 인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국세청이 마음만 먹으면 조사를 통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접대했는지를 확인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비롯해 각종 위기에도 우리 기업들이 버틸 수 있던 것은 접대비실명제 시행 등을 거치면서 실천해온 윤리경영, 투명경영, 건전경영이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울수록 원칙과 기본에 충실해야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접대비실명제에 대한 논란과 시행 경험이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소위 김영란법)이 도입(2016년 9월 28일 시행)될 수 있었던 사회적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접대비실명제는 1968년부터 50년 이상 사용돼 온 '접대비' 명칭이 내년부터 '기업 업무추진비'로 바뀌는 데에도 기여를 했다. 기획재정부는 기업의 통상적·정상적 업무활동에도 불구하고 '접대비'라는 명칭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 2024년부터는 '업무추진비'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지난 해 세법을 개정했다. 이미 공공부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업무추진비'로 통일한 것이다. 다만 접대비 명칭만 업무추진비로 바뀔 뿐 그 적용범위나 증빙서류 등 세금처리는 현행과 동일하다.
과거에는 유흥이나 로비 등 잘못된 접대문화가 드러나면서 접대비가 부정적인 활동에 쓰이는 돈으로 인식되었으나, 접대비실명제를 계기로 접대문화가 많이 개선된 현실과 업계의 건의를 감안한 것이다.
11. 에필로그
노무현 정부 5년을 관통하는 정신은 '혁신'이다. 대통령께서는 언젠가 나에게 '혁신으로 맺은 우리의 인연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좋은 성과를 내달라'는 당부를 하셨다.
나는 국세청장 재임 중 이룬 혁신성과 덕분에 이후 청와대 첫 혁신관리수석비서관을 거쳐 행정자치부장관과 건설교통부장관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 중요한 국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특히 접대비실명제는 말도 많고 저항도 많았던 터라 이 때문에 중도하차할 수 있다는 주변의 염려도 많았다. 그러나 이에 흔들리지 않고 '생즉사 사즉생'의 자세로 밀어붙인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담쟁이' 청장이었다. 이후 나는 담쟁이 장관, 담쟁이 국회의원으로 불려졌고, 한 때 공직사회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에 그 의미가 잘 담겨져 있다. 이후 이 시는 내가 가장 애송하는 시가 되었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나는 2005년 3월 11일 퇴임식을 가졌다. 국세청 합창단과 우리 직원들의 '아침이슬' 송가를 들으면서 2년의 국세청장직을 마무리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청장으로 재임하면서 늘 아름답고 명예롭게 퇴진하고 싶었는데, 박수 받으면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노무현 대통령님 그리고 우리 국세청 직원들께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