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 서류 위조로 은행 내부통제, 외부 회계감사 무력화
- 2천만원도 거르는 FIU 감시망이 수백억 이동에는 구멍 숭숭
- 금감원 11차례 검사하고도 횡령 사실은 '깜깜'
◆…600억 대의 횡령 사고로 뒤숭숭한 우리은행 본점.
우리은행 횡령 사고의 전모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이들 4개 법인 및 기관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처하고 수습할 지에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내부통제나 외부감사·감독을 통해 횡령 범죄를 예방할 수 있었던 기관들이기 때문이다. 금융계에서는 이들 중 한 곳만이라도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이번 사건을 막았거나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개탄하고 있다. 또 최초의 횡령이 이루어졌던 2012년 당시 이들 법인 및 기관의 수장이었던 이순우 전 우리은행장, 박재식 전 FIU원장, 이재술 전 딜로이트안진 대표, 권혁세 전 금감원장의 책임 문제도 거론하고 있다.
◇사건의 윤곽
현재까지 확인된 바 횡령을 저지른 범인은 우리은행 기업개선부의 전 모 차장(43)과 그의 동생이다. 전 차장은 문제의 계좌에서 2012년 12월과 2015년 9월 각각 173억원과 148억원을 수표로 빼냈다. 2018년 6월엔 293억원을 이체 방식으로 빼돌린 뒤 해당 계좌를 해지했다.
그는 돈을 빼낼 때마다 은행 내부문서를 위조했다. 2012년과 2015년에는 부동산 신탁 전문회사에 돈을 맡기겠다고 기안을 올려 결재를 받아냈다. 2018년에는 자산관리공사(캠코)가 돈을 맡아 관리하기로 했다는 허위 문서를 꾸며 승인받았다. 그닥 대단할 것도 없는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얼핏보면 40여년 전의 명성사건 때 상업은행 김동겸 대리가 저지른 수기통장 사건과도 닮았다.
전 씨는 이렇게 빼돌린 돈의 행방에 대해 “일부는 파생상품에 투자하고 일부는 동생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부 날렸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본인이 약 500억원, 동생이 100억원 가량을 썼다는 것이다.
◇무너진 은행 내부통제 시스템
이런 범행 과정을 살펴볼 때 첫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이다. 수백억원의 돈이 움직이는 서류가 위조됐는데 결재과정에서 누구도 문서의 진위 여부를 챙겨보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내부통제가 허술했다는 반증이다.
전 씨가 해당 업무를 10여년간 전담했다는 부분도 주목된다. 은행권의 중요한 인사원칙 중 하나는 순환보직이다. 직원의 경력관리 뿐 아니라 금융사고 예방을 위해서다. 한 업무를 오래 하다 보면 금융사고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게 금융권의 경험칙이다. 그런 점에서 전 씨가 통산 10년이 넘게 같은 업무를 맡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여겨지고 있다.
◇구멍 뚫린 외부 감시 시스템
이번 사건은 은행의 내부 통제 뿐 아니라 외부 감사 및 감독의 허점도 드러냈다. 범행의 진행 과정상 외부 기관이 횡령 사실을 적발할 수 있는 첫 번째 체크포인트는 금융정보분석원(FIU)이었다. 전 차장으로서는 빼돌린 돈을 어떤 형태로든 다른 계좌로 입금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FIU는 의심거래보고(STR) 제도와 고액현금거래보고제도(CTR)를 통해 매일 금융기관에서 이뤄지는 거래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FIU가 지난달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전 차장이 횡령을 저지른 2012~2018년에 금융사들이 FIU에 신고한 의심거래보고(STR) 건수는 399만여 건에 달했다. 설사 의심거래처럼 안 보여서 STR 감시망을 피했다 해도 CTR 기준(2000만원, 2019년 7월 이후는 1000만원)을 훨씬 웃도는 거액이 이체됐으니 FIU에 보고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FIU는 세 차례나 이루어진 거액의 횡령을 포착하지 못했다. 은행에서 1000만원만 이체하려 해도 이것저것 성가신 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반 금융소비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FIU는 아직까지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FIU의 활동에 대해서는 업무의 성격상 자세한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는 얘기만 반복할 뿐이다. 마치 “우리가 하는 일을 자세히 알려고 하다간 다친다”는 투의 대응이다.
횡령 범죄를 조기에 막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체크포인트는 회계법인의 외부감사였다. 회계법인이 외부감사를 수행하면서 해당 계좌의 시재를 확인했다면 정 차장의 횡령은 조기에 적발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횡령이 벌어진 2012~2018년 우리은행의 외부감사인은 딜로이트안진이었다. 이와 관련,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29일 기자들과 만나 “기본적으로 회계법인은 회계감사를 하면서 시재가 확실히 존재하느냐를 봐야 한다”며 “왜 회계감사를 하면서 그런 것들을 놓쳤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회계법인에게 횡령을 적발하지 못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횡령과 같은 부정부패와 오류를 예방하고 발견할 책임은 ‘기업의 지배기구와 경영진’에게 있는 것이지 회계법인이 기업과 임직원의 범죄까지 발견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2012년 변경된 회계감사기준이 ‘회계감사는 수사가 아님’을 명시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변경된 기준은 “감사인은 문서의 진위에 대한 전문가로서 훈련을 받지 않았고 그렇게 기대될 수도 없다”고 기술해 감사인이 져야 할 책임의 한계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이번 사고에 대한 딜로이트안진의 책임 문제를 두고는 법적 다툼이 예상된다.
횡령 범죄를 조기에 차단할 수 있는 세 번째 체크포인트는 금감원의 검사였다. 횡령 범죄가 이루어진 2012년부터 2018년까지 금감원은 우리은행에 대해 일반은행검사국과 기획검사국, 은행리스크업무실, 외환감독국, 금융서비스개선국, 연금금융실 등을 동원해 모두 11차례 종합 및 부문 검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금감원이 11차례의 검사에서 적발한 사항은 부동산개발금융(PF대출) 심사 소홀로 인한 부실, 금융실명거래 확인 의무 위반 등 은행권에서 흔히 이뤄지는 위규 사항에 그쳤다. 전 차장의 횡령범죄는 금감원의 검사망을 감쪽같이 피해갔다.
금감원은 작년 말부터 올해 초 사이에도 우리은행에 대해 현장 종합감사를 진행했으나 이번 사건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와 관련, 정은보 원장은 앞서 회계법인의 책임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은행의 횡령사고를 왜 감독원이 밝혀내지 못했느냐 하는 부분도 같이 조사하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