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 이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전쟁 불가' 의지를 거듭 밝혔다. “한반도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린다”며 “우리 국민은 안심하고 믿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결정 없이 누구도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며 “미국이 북한에 대해 어떤 옵션을 사용하든 사전에 한국의 동의를 받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한미간의 굳은 합의”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모든 것을 걸고 전쟁만은 막을 것”이라고도 했다.
북한의 추가도발에 대한 경고는 물론이고 미국을 향해서도 '일방적인 군사행동은 불가'라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미 국무부는 “북핵문제는 북한과 전 세계의 문제”라며 “미국만이 김정은 정권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문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이 위협을 받을 때 군사행동을 위해 한국의 동의를 받아야 할 의무는 없다”고 되받았고, 뉴욕타임스는 “문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이례적으로 직설적인 비난을 했다”고 썼다.
전쟁 위기설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반복되고 있는 한반도 현실에서 대통령이 전쟁만큼은 결단코 막겠다고 단호한 의지를 천명한 것은 크게 반길 일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이것이 가능한가에 있다.
북미간 '말폭탄 전쟁'은 상호자제로 소강국면이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은 “미국의 행태를 좀 더 지켜 볼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고, 트럼프 미국대통령도 “북한의 김정은이 매우 현명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고 화답했다.
미국 국무부는 “북한과 기꺼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며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괌
타격 계획' 같은 도발적 언행 중단을 대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
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구체적인 대화조건을 제시한 건 처음이다.
21일부터 시작된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합훈련에 미국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스텔스전폭기 등 전략자산이 투입되지 않고 훈련참가 미군병력을 30% 축소한 것도 북한 측 반발을 의식한 유화제스쳐로 보인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이에 앞서 미국이 '북한정권교체 시도나 체제붕괴 추구, 한반도 재통일 촉진, 미군의 38선 이북 진격 금지' 등 이른바 '4 Nos'가 미국의 대북정책 기조임을
거듭 천명했다. 이런 흐름이라면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북미대화가 열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럼에도 트럼프행정부의 대북메시지는 여전 혼란스럽다. 틸러슨 국무장관조차 “외교적 해법을 선호하지만 군사적 행동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의 갑작스런 경질이 미국의 복잡한 속내를 읽게 한다. 배넌은 한 인터뷰에서 “누군가 1000만 서울시민이 개전 30분 만에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정식의 일부를 풀 때까지 군사적 해결책이 없다”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적 해법은 없다.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장전 완료' 언급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그의 발언에 트럼프가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배넌은 중국이 북한 핵개발을 동결시키는 대가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외교적 협상도 고려해야한다고 부연하기도 했다.
선제공격과 심지어 예방전쟁까지 들먹이며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고 있는 미국입장에서 군사적 카드가 없다는 실토는 미국의 안보이익을 해치는 '천기누설'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핵과 탄도로켓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고, 미국과의 비공식적 접촉에서 북한측은 북·미 평화협정, 한미동맹 철회, 북한을 겨냥한 핵무기·미사일 철수 등 미국이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적 제재와 압박일변도 정책은 중국과 러시아가 적극 협력해준다 해도 핵무기로 '옥쇄'도 마다않는 북한에게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군사적 해법뿐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마지막 남은 온건파까지 날려버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워싱턴 정가의 대북기류 역시 강경일변도다. 예방적 선제공격카드는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고, 일련의 대북제재조치와 대화 제스쳐도 군사적 행동을 위한 명분축적용일 수도 있다.
한미연합훈련을 계기로 대북군사전략을 총괄하는 태평양사령관, 전략사령관, 미사일방위청장 등 미군 '톱3'이 릴레이로 방한해 최고수위의 대북경고를 발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에 대한 선제공격은 엄청난 모험이 따른다. 핵시설 파괴로 방사능 누출위험이 따르고 북미 간 핵전쟁으로 확전되면 한반도는 공멸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예방타격을 감행했다 확전이 돼 많은 민간인 피해가 생겼을 경우 한미동맹도 설자리를 잃는다.
미국이 이를 모를 리 없겠지만 오판과 오인, 충동적 광기 때문에 '원치 않은 전쟁'이 현실화된 경우도 역사상 적지 않다. 취임 이후 트럼프는 정치적 곤경에 처할 때마다 엉뚱한 방향으로 주의를 돌리곤 했다. 1998년 의회에서 공화당 주도의 탄핵에 직면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라크 공습을 명령했던 것과 같은 유혹을 트럼프도 받을 수 있다.
북한이 괌이나 미국본토를 먼저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이 우리를 제쳐놓고 북미대화만 고집하는 것은 그들 체제의 존망이 미국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 카다피의 비극적 최후에 대한 트라우마 탓이다.
미국이 제시하는 대북대화 조건이 '비핵화'에서 '핵동결'이나 '도발중단'으로 수위가 낮아지면서 상수(常數)였던 주한미군의 존재도 변수로 바뀌는 분위기다. 전쟁 아니면 미군이 철수한 가운데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남는 황당한 사태도 배제하지 못한다.
문대통령은 “우리 안보를 동맹국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 스스로 우리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다” 며 평화도 분단극복도 우리 힘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어야 하고, 미국은 물론 중국과도 적극적인 전략대화를 통해 북핵 동결이후 북핵 폐기 프로세스와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전쟁은 말이나 의지만으로 막아지는 것은 아니고 전쟁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낮출 수 있는 정책과 전략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대화를 통한 해결을 '굴복'으로 치부하고 최고조의 압박과 제재로 항복받기에 집착할수록 전쟁가능성은 높아질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