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을 놓고 찬반양론이 복더위만큼이나 뜨겁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기념행사'에서 탈(脫)원전을 공식 선언했다.
이어 정부는 27일 국무회의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일시 중단하고 공사계속 여부를 3개월간 공론화과정을 거쳐 시민배심원단이 최종 결정토록 했다.
이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은 지난 14일 기습적으로 이사회를 열고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일시중단을 의결했다. 전날 경주 본사에서 한수원 노조의 반발로 무산된 이사회를 이날 경주의 한 호텔로 장소를 옮겨 '공론화 기간 중 공사 일시중단'을 의결한 것이다.
신고리 5.6호기 건설은 정부기구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38개월간 심의를 거쳐 작년에 허가했다. 경남 울산 울주에 건설 중인 신고리 5·6호기는 공사가 29% 진행된 상태다.
공사 일시 중단은 당장 관련 업체 종사자 1만2800명에게 직격탄이다. 협력업체만 1700여 개, 현장 인원도 1000여 명인데 이들이 일손을 놓아야 한다. 3개월간 인건비 120억 원을 포함해 1000억 원 가량을 시공업체들이 떠안아야 할 판이다.
정부 추정으로 2조6000억원의 피해가 발생하고, 지역경제 악영향까지 감안하면 손실은 7조원이 넘는다고 보수야당 쪽은 주장한다. 공정률 90%가 넘어 건설중단이 불가능한 신고리 4호기와 신한울 1·2호기를 제외하고 새로 건설하던 원전 6기 가운데 신한울 3·4호기, 천지 1·2호기 등 4기는 설계와 환경영향평가 용역을 이미 중단한 상태다. 갑작스런 중단에 따른 중장기 손실과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의 원전 산업은 1977년 6월 고리 1호기를 완공한 이래 급속도로 성장했다. 당시 세계 21번째 원전을 둔 국가였지만 40년 만에 세계 4위 원전대국으로 올라섰다.
고리, 월성, 영광, 울진 등 4개부지 22기 원전에서 생산하는 전력은 국내 전력생산량의 31.5%를 차지한다. 2009년에는 아랍에미리트(UAE)에 3세대 한국표준형원전(APR1400) 4기를 건설해주는 공사를 총 186억 달러(21조원)에 따내 세계 5번째 원전수출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연 매출 26조8000억 원, 99% 기술자립으로 600조원 세계 원전시장에 진출한 수출 산업을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라고 원자력산업계는 아우성이다.
탈(脫)원전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 원전선진국들이 경제논리에서 시민 안전이라는 공동체 가치 추구 쪽으로 에너지정책을 속속 전환하고 있다.
인간 삶의 가치를 비용으로만 따질 수는 없다. 생산단가가 가장 싸고, 원전 사고율도 확률적으로 항공기사고율보다 훨씬 낮다고 하지만 사고가 났다하면 치명적 재앙을 안긴다. 게다가 설계수명이 다된 원전의 폐기,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는 미래세대에 두고두고 후환이다.
문제는 현실적 대안과 그 방법론이다.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자원빈국 한국에서 원전은 에너지 안보의 기둥이다. 하지만 한국이 압도적 원전 밀집도 1위 국가이자 지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국토라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탈원전, 탈석탄,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는 지난 대선 때 주요후보들의 공통된 공약이었다. 그중 한 명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공약 이행을 위해 노후 원전 폐쇄와 건설 초기단계인 원전재검토를 결정해 '원전전쟁'이 앞당겨 졌다. 심지어 보수후보들도 신고리 5·6호기 건설의 재검토(유승민) 혹은 지질조사 결과의 반영 후 결정(홍준표)을 약속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까지 높이고 석탄발전을 줄이고, 탈원전 국가로 변모시키겠다고 천명했다. 2030년까지 원전 및 석탄발전의 신규 건설과 수명 연장을 전면 중지한다면 현재 원전 설비 비중 21%는 13%로, 발전량의 경우도 32%에서 18%로 떨어진다. 또한 현재 39%인 석탄발전 비중도 24%대로 급감한다.
이 빈자리를 과연 신재생에너지가 메울 수 있느냐는 것이 문제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인정하는 한국의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1.1%다. 신재생에너지 발전 대부분이 국제적으론 인정받지 못하는 폐기물 바이오에너지 폐가스에서 나오고, 정작 신재생에너지로 여기는 태양광이나 풍력은 고작 0.7%, 0.2%에 불과하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높여도 일기변화 등으로 피크수요 때의 기여도는 10% 이하여서 비싼 액화천연가스(LNG)발전 비중을 현재 19%에서 37%로 배로 늘리지 않으면 정전위험이 커진다. 전력요금은 20~80% 오르면서 안정적 전력수급기반 약화가 우려된다.
2031년까지 적용될 8차 전력수급계획상의 전력수요 전망치가 2년 전보다 무려 11.3GW 줄어들 것이라는 최근 워킹그룹 보고서도 논란을 키우고 있다. 이 용량은 100만㎾급 원전 11기에 해당돼 이 예측대로라면 원전 11기 정도는 더 짓지 않아도 된다.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3%대에서 2%대로 낮춰 잡은 데 따른 것이라지만 '탈원전'의 정책기조에 따라 원전 건설 중단의 근거를 만든 것 아니냐는 의심도 사고 있다.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은 3개월간의 공론화위원회 논의를 거쳐 9명의 시민배심원단이 결정하게 된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정부는 이 결정에 반드시 따르겠다고 한다.
국가 에너지 백년대계를 비전문가인 시민배심원단이 3개월 만에 결정한다니 이게 될 말이냐는 반론들도 쏟아진다. 하지만 공론조사는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해 집단지성을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숙의민주주의 방법이다.
탈원전은 독일의 경우가 그러하듯 과학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 가치를 구현하는 윤리적 결정이다. 전문가들은 공론화 과정에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최종결정은 전기를 쓰고, 세금을 내야 하는 시민들의 관점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핵심은 중립적인 시민배심원단 구성과 정확한 정보 전달, 조사의 공정한 진행이다. 가스발전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요금 상승 등 소비자의 추가부담을 어느 수준까지 감내할 수 있느냐는 등 사회적 인내에 관한 합의도 중요하다.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건설 중단에 대한 찬반여론은 41% 대 37%로 팽팽하다. 중요한 것은 탈원전에 대한 찬반이 '반핵운동권' 대 기득권 '원전마피아'의 이념대결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전력에너지에 보수와 진보, 좌와 우가 있을 수가 없다.
신고리 5·6호기의 공사 중단은 탈원전을 향한 첫걸음일 뿐이다. 독일이 탈원전 정책에 도달하는 데 25년, 스위스는 33년이 걸렸다. 우리보다 앞서 탈원전을 택했던 일본과 영국 등은 최근 원전 재개 쪽으로 유턴하고 있다.
시민배심원단이 건설 중단이냐 계속이냐의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제3의 선택방안도 열어놓는 등 유연성도 필요해 보인다.
무엇에 쫓긴 듯 밀어 붙이지만 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환경·전력수급·전기요금 등 다양한 요소를 두루 포괄해 에너지 국민 컨센서스를 이루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