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대통령의 외교가 그 진용도 채 갖추어지기 전에 호된 시험대에 올랐다. 대선후보 때부터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배치와 대북정책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시각차를 보여 온 터라 한․미간 갈등은 어느 정도 예상돼 왔다.
하지만 워싱턴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대통령이 절차적 정당성을 내세워 사드 배치가 지연될 것이며 이에 대한 미국의 이해를 공개적으로 주문함으로써 동맹관계에 전례 없는 긴장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사드 발사대4기 추가 반입'에 대한 진상조사를 지시한 직후 청와대를 예방한 딕 더빈 미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에게 조사 지시는 “전적으로 국내적 조치”이며 “기존의 결정을 바꾸려거나, 미국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환경영향평가와 국회논의를 들어 사드배치가 지연될 것임을 시사했다. 문 대통령은 “환경영향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미국이 이해해 주어야 한다”며 이해를 구했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사드문제로 한국이 중국과 외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중국에 사전에 설명하는 절차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중국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미국도 중국에 대한 노력을 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한걸음 더 나갔다.
더빈 총무가 즉석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직후 영문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이 사드를 원치 않으면 우리는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 사드배치 및 운용비용)를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실제 면담에선 그런 발언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더빈 총무는 인터뷰에서 “북한이 퍼부을 수백 발의 미사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드시스템을 원할 것 같은데 왜 그런 정서가 지배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문 대통령이 정치적 과정으로 끌고 가고 싶은 것으로 보였다”고 배경을 분석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의중은 사드배치를 늦춰 이를 미국과 중국 간 '전략적 카드'로 사용해보겠다는 쪽으로 읽힌다. 한쪽으로는 국회 차원의 논의를, 다른 한쪽으론 환경영향평가의 엄격한 실시를 강조하면서 시간을 번 뒤, 중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설득하는 식으로 일종의 빅딜을 시도해보겠다는 얘기다.
이같은 구상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방미 중 '사드배치연기 불가피' 발언으로 더욱 구체화됐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면담 후 '설명해줘서 고맙고 이해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해한다'는 지지나 동의가 아닌 '지켜보겠다'는 유보의 뜻이 강하다.
문제는 환경영향평가에 걸리는 시간이다. 주민 공청회 개최 등이 포함된 전략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할 경우 전례를 볼 때 평균 1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국방부는 골프장 부지 32만여m² 중 사드 사업면적은 10만m²로 민간인 토지를 33만m² 이상 매입하는 경우 등에 실시하는 대규모 전략환경영향평가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환경영향평가를 굳이 고집하는 데는 사드 배치지연을 넘어 백지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오해도 안팎에서 사고 있다.
만약 1년 이상 사드의 정상 가동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미국이 사드 철수를 결정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한미동맹관계는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사드 배치 속도를 늦추면서 대미·대중 외교적 레버리지로 삼는 접근법이 성공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한 둘이 아니다. 일 년 정도의 논의기간을 두고 미국은 사드 운용을 보류하고, 중국은 보복을 중단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내부적으로 국회비준 동의 절차를 밟으면서 대외적으로는 남북한과 미국과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에서 북핵․사드․평화체제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빅딜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말로는 쉽지만 이는 엄청난 외교적 도전이다.
안보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경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택할 수 있는 대외정책 공간은 스스로 한정돼 있다. 중국이 공세적인 대외정책으로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할수록 미·중 간 경쟁과 갈등 국면은 격화되고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는 전략적 딜레마 상황에 빠진다.
경제협력을 통해 중국과 정치적 신뢰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적 의도는 사드 한 방으로 물거품이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전화외교와 특사외교로 미국 및 중국 고위층 간 대화가 재개되긴 했지만 대통령특사 자리배치에 따른 의전결례 논란은 우리 국력의 현주소를 절감케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강대국결정론에 우리운명을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주 제주포럼 개회식에 보낸 영상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중국 등 관련국들과 함께 북한을 설득하고 압박해 대화의 장으로 이끌고,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을 함께 이뤄내겠다”며 “외국역할론에 기대지 않고 한반도 문제를 대한민국이 주도해 나가겠다”고 야심차게 밝혔다.
북핵 해결에 우리가 주도권을 가지려면 북한과의 선제적 대화가 필수적이다. 거듭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도발로 대화기조를 뒷받침할 국내외의 정치적 공간은 매우 좁혀져 있다. 하지만 비핵화가 끝나야 대화할 수 있다는 자세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북한은 핵보유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더 이상의 상황 악화를 막고, 현재의 수준을 동결시킬 과감한 협상이 필요하다. 트럼프가 내세운 '최대의 압박과 관여' 정책에서는 압박과 관여 사이를 연결하는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연결고리를 남북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면 비핵화와 평화체제구축의 병행추진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북한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며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고 트럼프와 시진핑을 '정중하고 당당하게' 만나 미․중간 절충점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다.
사드 논란은 문대통령의 집권이 유력해지자 대선전에 배치를 서두른 데서 불거졌다. 동맹관계에 악재임은 분명하지만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정착이라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창의적인 해법을 도출해 낼 수 있다면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동맹은 종속관계가 아니라 갈등관계를 슬기롭게 관리해 나갈 수 있을 때 더욱 건강해진다. '문재인표 안보'에 불안해하는 야권과 국민들에게 진솔하게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는 노력도 병행해야한다. 그래야만 국내통합을 기하면서 대외협상력도 높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