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힘으로, 헌법의 힘으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시킨 2017년 3월10일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 이정표로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당사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복여부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정사는 '3·10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 틀림없다. 헌재 판결은 대통령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 앞으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받고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자세와 조건에 관한 추상같은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던졌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 내는 힘의 원천”임을 선언하고 대통령의 권력보다 헌법 수호가치가 훨씬 소중함을 일깨웠다.
헌법 및 법률위반 행위가 대통령을 파면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를 따지는 대목에서 헌재는 대통령의 '헌법정신을 수호할 의지'에 주목했다. 국회와 언론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실을 은폐하고 관련자를 단속해온 점, 대국민담화에서 진상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해놓고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한 일련의 언행 등으로 미루어 '법 위배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헌법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이 국가의 기본을 부정하고, 국민을 무시하고, 검찰 등 국가권력의 명령을 존중하지 않는 등 국민의 대리인으로서 응분의 도리(道理)를 다하지 못했다는 데 방점을 찍은 진일보한 판결이었다.
헌재는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파면에 따르는 국가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강조했다.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이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헌재의 선고 한 마디에 모든 걸 내려놓고 청와대를 떠났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그 누구도 국민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헌법은 모든 권력에 더욱 엄격할 것이고, 국민은 자신의 권력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를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학습했다. 앞으로 선출될 대통령은 더욱 엄혹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하고, '통치'를 빙자한 국가권력남용에 국민은 더 이상 호락호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 대통령, 공조직 중심의 비선 없는 투명한 대통령, 독선적 사고에 빠지지 않고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는 대통령을 요구할 것이다. 국민을 섬기며 소통하고,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헌법34조)하는지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탄핵심판의 시작과 끝은 정경유착이었다. 대통령이 자신과 측근의 사적 이익추구를 위해 공적 조직을 동원해 민간기업 등을 움직였다는 것이 핵심이다. 대통령이 기업에 미르 ․ 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강요하고 이권사업 및 인사에 관여한 것에 대해 “기업의 재산권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보충의견에서 “정치권력과 재벌기업의 유착은 그 기업에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만 다른 경제 주체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정경유착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권력이 기업에 돈을 요구하고 경영에 간섭하는 기존 관행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헌법 위반행위임을 헌재가 명확히 한 것이다.
대기업들이 관청상대 업무조직을 축소하고 대외활동도 자제키로 하는 등 변화의 조짐도 감지된다. 상법 개정 등 정경유착을 막는 제도적 개선책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광장 촛불 민심의 요구는 대통령과 정권 퇴진이었지만 그 사회적 배경을 이룬 것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인 국가주의와 정경유착, 그로 인한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였다. 박근혜가 그토록 소망했던 아버지 박정희의 역사적 복원은 그 누구도 아닌 박근혜 자신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대통령이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재벌과 법조․관료․군부․언론 등 기득권집단들과 권력카르텔을 형성하며 전횡과 국정농단을 일삼는 것은 박정희 시대 때부터 고착화된 시스템이다.
경제성장의 이름으로 특정 재벌을 키우고, 재벌은 정권에 비자금을 대주고, 언론은 이를 눈감은 채 국민들의 관심을 호도하는 대가로 제4부로서의 권력을 갖는 기득권 카르텔은 계층 간 격차를 갈수록 벌리며 '그들만의 리그'로 우리사회의 균형적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조작된 지역주의, 세대분열, 안보위기에 기대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패권을 도모하는 정치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게 시대적 요구다.
헌재는 보수-진보라는 이념의 문제보다 헌법적 가치가 우선한다고 천명했다. 다양한 이념과 가치관을 가진 국민들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구시대 유산을 대신할 민주적 대안을 도출해 내야하는 과제를 우리 모두에게 안긴 것이다.
박정희 신화의 붕괴가 곧 세상의 붕괴이자 자신을 부정(否定)하는 일로 받아들이는 국민들도 적지 않다. '친박단체'들은 집회에서 '탄핵 배후는 북한'이라며 '계엄령 선포'를 버젓이 주장한다. 국가의 주인에서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는 시대착오적 사고가 경악스럽다.
하지만 국회 탄핵 소추안 처리 과정에서 새누리당의 분열, 거기서 이탈한 비교적 합리적 보수 성향의 의원들에 의한 바른정당의 등장, 또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에서조차 탄핵결정에 대한 긍정적 여론이 우세하는 등 희망적 요소도 적지는 않다.
보수는 더는 성장과 안보 제일주의라는 '박정희 신화'에 매달려 집권하려는 아집을 버리고 시장과 시민사회에서 민주주의 증진을 통해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는 합리적 보수의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진보는 '종북프레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포용적 성장과 복지국가, 한반도 평화에 관한 실천적 해법을 내놓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우리 운명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크게 좌우된다. 북한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평화도 생존도 없다. 북한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군사 안보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 없고, 급변하는 안보환경 속에 유연성을 발휘하며 긴장을 관리하고 평화토대를 구축하는 창의적 외교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3․10탄핵'으로 박근혜는 쫓겨났지만 박근혜를 만든 시스템을 그대로 둔다면 또 다른 박근혜가 나타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적폐청산' 차원을 넘어선 국가대개조가 필요하다.
법치를 기반으로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불평등과 격차를 해소시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제도적 대안을 만들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을 때 우리 헌정사는 '3․10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