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출범한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 행정부가 연일 통상·무역 분야에서 강공책을 쏟아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자신을 뽑아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국가정책의 틀을 다시 짜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멕시코 국경장벽 설치, 반(反)이민 행정명령 등 상식을 넘어서는 조치가 줄을 잇고 있다.
미국우선주의가 정책으로 구현되면서 지난 70여 년 동안 미국이 설계하고 주도해왔던 전후(戰後)질서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뿌리 채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는 대내외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기록적 속도로 일하고 있다” “대선 때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매일 이행하고 있다”고 기염이다.
일찍이(1848년) 대영제국의 총리 파머스턴 자작은 “영원한 맹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로지 우리의 이익만 영원하고 영속적일 뿐이다”라고 갈파했다. 트럼프는 '힘을 통한 평화', '미국상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고 윽박지르며 미국이 창안하고 보증해온 오늘의 개방적 글로벌시스템에 그 자신만의 룰을 고집하고 나선 것이다.
트럼프는 취임 후 외국정상과의 첫 회담을 '특수관계'인 영국 테레사 매이 총리와 가졌다. 두 정상 모두 '자국 제일'을 외치며 이념보다 실리를 중시한다고 선언했다. 트럼프와 매이총리는 자유주의적 기득권질서에 저항하는 트럼프현상과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찬성투표가 낳은 쌍생아다.
트럼프식 보호주의의 출발점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을 폐기하고 일대일 양자협정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다. 양자협정은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상대국에 공세적 요구를 펼치기에 유리한 구도다.
트럼프는 한걸음 더 나아가 양국 간 통상협정 체결 때 통화 약세화 시도를 강력하게 제한하는 환율관련 조항을 협정문에 포함시킬 것을 상대국에 요구할 방침이다.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는 나라 입장에서는 통상과 통화 양면에서 2중의 압력을 받게 된다.
트럼프는 환율조작에 따른 미국 달러가치의 상대적 상승이 미국 고용을 크게 해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TPP 탈퇴도 환율조작방지장치의 미비 때문으로 전해진다.
당장 우리 입장에서 환율조작 문제와 한미 FTA 재협상이 발등의 불이다. 트럼프의 강공책이 본격화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우리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거나 수입규제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 재무부는 현저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200억달러 초과), 상당한 경상수지 흑자(GDP 대비 3% 초과), 외환시장에 대한 일방적 개입 여부(GDP 대비 순매수 비중 2% 초과) 등 세 가지 기준으로 환율 조작 여부를 판단한다. 지난해 10월 재무부의 환율보고서는 중국을 포함해 한국, 일본, 독일, 대만, 스위스 등 6개국을 1개 이상의 기준을 충족한 관찰대상국으로 지정한 상태다.
6개월 후인 오는 4월 환율보고서가 발표될 예정이다. 트럼프 정부의 칼날은 일차적으로 중국을 겨냥하고 있지만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경우 한국도 유탄을 맞을 수 있다. 대미 수입 확대조치 등으로 무역 흑자폭을 줄이는 등 국가적 대비가 필요하다.
원화가 절상되면 2위의 수출시장 미국에 대한 수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한미FTA의 경우 개정을 넘어 폐기까지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 못하는 상황이다. 만약 폐기될 경우 4년 간 수출이 130억 달러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세계적 불황속에 우리 수출은 2년 연속 감소하다 지난해 11월부터 조금씩 살아나고 있고 올해 5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해 3년 만에 반전을 이끌어낸다는 각오다.
하지만 최대 수출시장 중국이 사드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규제, 화장품 통관과 전세기 운항 불허, 각종 반덤핑 공세까지 벌이고 있고, 우리 당국의 항의에도 중국은 미동도 않은 채 보복목록만 늘어나고 있다.
더 큰 걱정은 트럼프의 '중국도박'이다. 트럼프는 '하나의 중국'을 미끼로 지난 1980년대 일본이 미국에 대해 실시했던 자발적 수출규제를 중국에 요구할 전략까지 세워놓고 있다. 미․중간 마찰로 중국의 대미수출이 줄어들면 그 피해는 바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한국은 대만과 함께 대미수출 규모가 크고 중국의 경기둔화에 가장 많이 노출된 개방적인 소국이어서 트럼프정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될 나라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중국 등 아시아 신흥국 자본유출 우려도 커지고 있어 만일에 대비한 적정수준의 외환보유액은 필요하다. 현재 3700억달러 규모 외환보유액은 여러 국제적 평가기준으로 봤을 때 부족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긴장감을 늦출 때는 아니다.
최근 3개월 치 경상수입액(1027억달러)과 유동외채(11월말 기준 1800억달러)만을 고려하면 약 880억 달러 여유가 있다고는 하지만 외국인투자자금 총액(4900억달러)의 3분의1을 추가한 기준으로 보면 750억 달러가 부족한 셈이다. 급할 때 마이너스 통장처럼 융통할 수 있는 일본과의 통화스왑협정이 이래서 아쉽다. 보유액을 늘리려들 경우 '달러화 매입'을 통해 강한 달러를 유도했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어 이 역시도 부담스럽다.
트럼프 취임과 더불어 미국은 국내적으로 송유관 건설 규제완화 세금감면 등 '친(親)기업행보'에 따른 시장기대감이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를 잠재우는 양면성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식 보호주의는 미국 기업들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외국산 제품에 대해 고관세 장벽을 쌓아 인위적으로 무역흑자를 유도하면 달러강세와 수입물가상승을 자극해 수출기업과 소비자를 힘들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론 트럼프 정책이 경제성장과 주가상승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기후협정에까지 불똥이 튀었다. 그는 이 협정이 미국 제조업을 비(非)경쟁적으로 만들려는 중국에 의해, 중국을 위해 만들어진 음모라면서 석유 가스 중심의 '親화석연료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19세기중반 파머스턴 총리의 '영국 우선주의'는 대영제국이 충분히 강하고 그들만의 노선을 밀어붙일 만큼 충분한 힘을 가졌기에 통했다. 하지만 오늘의 글로벌시스템은 경제 기술적으로 너무도 연결돼 어느 한 강국이 자기만의 룰을 강제하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트럼프의 반(反) 이민정책이 정보기술 등 미국 내 모든 산업에 경제적 충격과 함께 전 세계국가들 간에 균열을 불러오면서 정치 외교 경제 전반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우리 정부도 올해 대외경제정책 첫머리에 '대외리스크 관리 강화'를 내세웠다. 한․미간 협의채널을 조기에, 최대한으로 가동시켜 선제적 대응으로 우리경제에 대한 트럼프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데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