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정유년(丁酉年)은 '붉은 닭'의 해다. 닭은 잠든 세상을 깨우고 새벽을 여는 상서로운 존재다. 하지만 지난 연말부터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으로 닭들이 전례 없는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양계농가는 살 처분으로 국민은 계란 품귀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 나라 또한 헌정사상 최악의 국정농단사건으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고 국정이 거의 마비되는 등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있다. 닭의 울음이 새 날을 열듯 대한민국이 어둠을 헤치고 새로운 희망을 여는 정유년이 될 수 있을까.
당장 우리 앞에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과 대통령선거라는 국가 중대사가 놓여 있다. 2017년 대선은 원래 12월이다. 하지만 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된다면 헌정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강제 퇴진당하고 그에 따른 조기대선을 치러야 한다. 대선국면이 조기에 열리면서 개헌론에도 불이 붙고 있다.
대통령 탄핵사태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도사려있는 구태와 적폐를 바로잡지 않고는 나라가 결코 도약할 수 없다는 반성의 공감대는 폭넓게 퍼져있다. 어떤 지도자를 새 대통령으로 뽑느냐 또 국가시스템을 어떻게 새로 정립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위기가 도약의 기회로 반전될 수 있다. 반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조기대선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선구도는 2강(强)1중(中)의 다자대결구도다. 하지만 대세를 이끌만한 탄탄한 후보가 아직은 없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비박계의 보수신당은 영남권-보수 성향 유권자에 뿌리를 박고 있음에도 대선후보 지지율 선두권에 드는 후보가 한 사람도 없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지율 선두를 지키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35%에서 5%대로 추락하는 동안 20%대의 박스권을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민주당이 문 전 대표의 2선후퇴와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배제' 약속으로 원내 1당으로 부상했지만 곧바로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로 복귀하면서 외연 확장성을 상실한 상태다.
촛불시위에서 고개를 든 '이재명 현상'은 지지율 부동의 3위로 대선 판 상수로 자리 잡았지만 그 확장세는 미지수다.
잠재적 여당후보로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큰 변수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유력 주자 문 전 대표에 맞선 '반문재인'구도, '제3지대 연대론', 개헌을 고리로 한 반기문 중심의 '비문․비박' 연대가능성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난무하고 있다.
반기문 후보가 어느 쪽으로 갈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은 지역주의 놀이판의 '조커'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우려들도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으로 가면 'TK-충청 연합', 개혁보수신당으로 가면 '영남-충청 연합', 국민의당으로 가면 '호남-충청 연합'이 돼 어느 쪽으로 가든 충청도를 자산으로 반(反)문재인 지역주의 연합을 형성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반 후보가 내세우는 '통합'과 '포용적 리더십'에 배치된다. '제 한 몸 불사르겠다'는 말뿐인 각오를 넘어 나라를 위해 어떤 자기희생을 할 수 있는지 몸으로 보여 이런 우려들부터 불식시켜야 한다.
19대 대선은 단순히 대통령을 새로 뽑는 차원을 넘어선다.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과도한 권력집중과 이로 인한 비리의 만연이라는 후진적 정치행태를 청산하고, 발전된 한국사회에 걸맞은 국가시스템을 새롭게 정립하는 소중한 기회다.
국가시스템 개조에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고 권력구조를 재편하는 개헌 논의는 긴요하다. 하지만 정치권만의 권력 나눠 먹기 식 개헌이나 불리한 정치세력의 정국 돌파용 개헌은 곤란하다. 권력구조를 개편에 앞서 선거제도부터 개혁하고 '갑질 정치'를 양산하는 국회의원 특권도 축소시키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다.
국회 개헌특위에 민간인을 참여시켜 함께 논의하고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해 실시간 인터넷을 통해 국민의 입장을 반영하는 등 국민을 위한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한다. 물리적으로 대선에 앞서 하기 어렵다면 다음 대통령 임기 중에는 이뤄지도록 불씨를 살려가야 한다.
조기대선이 가시화하면서 '대선잠룡'들의 행보가 바빠지고 정당 간 이합집산도 개혁보수신당의 등장으로 속도가 붙었다. 결선투표제 도입이 중요한 아젠다로 부상하고 각 정당의 경선 룰을 둘러 싼 치열한 수 싸움도 벌어질 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 끼리 판을 짜면 국민이 표를 몰아주던 시대는 지났다. 지난 총선에서 3당 체제를 만든 것도 탄핵 압박으로 4당 체제를 만든 것도 국민이다.
탄핵사태를 겪으며 쏟아진 '이게 나라냐'는 질타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국민들의 처절한 절규다. 우리 아이들이라도 제대로 된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정권교체를 넘어선 '시대교체'를 국민들은 요구하고 있다.
19대 대선은 기득권에 대한 심판의 장이 되어야 한다. 국정농단 사건의 주역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이지만 각 분야의 기득권 세력들이 부당한 이익을 공유하거나 최소한 방조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국민 대중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사는 지식엘리트 경제엘리트 법률엘리트의 공고한 카르텔이 그 조역들이었다.
기득권에 안주하거나 변화를 거부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울하다.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과 대립은 진영싸움으로 고착되면서 국가의 성장에너지를 갉아 먹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그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고 상호보완적 정책경쟁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소득 분배의 심각한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 책무는 공동체의 번영과 존속을 위한 보수의 근본가치다. 보수가 시대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수구(守舊)가 되고 거슬러 고집하면 반동(反動)이 된다. 기득권과 이권의 함정을 피하고 시대변화를 수용하면서 지켜나가는 것이 진정한 보수다. 개혁보수신당과 새누리당의 '보수 적통' 경쟁이 건강한 보수를 정립시키고 정치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차기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민주적 소통의 리더십이다. 불통의 정치가 비선 실세를 키우고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만들어 국격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오늘의 탄핵사태는 5년 전 박근혜 후보에 대한 검증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됐다. 이번 대선과정에서 이 같은 과오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정유년은 역사적으로 1597년의 정유재란(丁酉再亂)과 1897년 대한제국 설립을 떠 올린다. 정유재란 때 임금 선조는 왜병들에게 쫓겨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고 대한제국 역시 망국과 식민지 길로 접어든 조선 왕조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2017년이 역사적으로 '정유탄핵'을 넘어 대한민국이 재도약한 국가대개조의 해로 기록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