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들 감사기일에 쫓겨 격무에 시달려 감사품질 떨어져"
"결산월 변경 기업에 인센티브 제공해 결산기 분산 유도해야"
"비상장기업의 재무제표 제출기한 연장 등 제도개선 시급"
2년 전 회계감사 시즌인 2월 A회계법인의 회계사가 제주 출장 중 호텔에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족들은 과로사라고 주장했다. 평소 건강하던 30대인 그가 감사시즌이면 그야말로 '죽을 정도'로 일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B회계법인은 감사인력이 부족해 임시직과 계약직 공인회계사를 채용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것이 바로 감사시즌에 드러나는 우리나라 회계감사 시장의 민낯이다.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대부분인 2만5000개 가까운 기업이 12월 결산을 채택하도록 방치해 '감사대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산기 집중으로 인한 회계감사 업무과중은 감사품질 저하로 이어져 회계투명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모 회계법인의 품질관리실장은 "감사시즌이면 회계사들이 감사시일에 쫓겨 극심한 격무에 시달리게 돼 업무효율성이 떨어지고 감사품질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회계사들이 육체적 한계를 지닌 상황에서 감사업무를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문제"라며 "관련 제도를 개선해 감사업무 환경을 고치지 않는다면 회계투명성 제고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외감 대상 기업 중 93%가 12월 결산, 회계법인은 '헉헉'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외부감사 대상 기업은 모두 2만4951개이며 이 중 12월 결산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이 무려 92.8%에 달한다.
외감대상 기업은 재무제표를 1월말까지 회계법인에 넘겨야 한다. 외부감사인은 이들 기업으로부터 재무제표를 넘겨받아 2월부터 3월 중순까지 짧은 기간 안에 기업의 외부감사를 모두 완료해야 한다.
12월 결산 기업은 재무제표 감사와 정기주총을 거쳐 3월말까지 결산을 확정한 후, 법인세 신고까지 마쳐야 할 법적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이는 164개 회계법인이 1개 법인당 152개 기업의 회계감사를 최장 6주안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감사환경 아래서는 아무리 공인회계사 수를 늘린다 한들, 꼼꼼하고 예리한 감사인의 모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2011년부터는 IFRS(국제회계기준) 도입으로 연결재무제표 작성책임까지 생겨나 업무량은 그칠줄 모르고 늘어만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대다수 회계법인은 12월 결산기에 임시·계약직 회계사를 한시로 고용해 일손을 메꾸고 있다. 업종별로 전문화된 회계감사 역량을 발휘하겠다는 목표는 아예 포기한 셈이다. 숙련된 회계사를 주축으로 한 회계감사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회계업계 관계자들은 이같은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선 감사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회계업계는 이같은 결산월 집중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결산월을 변경하는 기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해 결산월 변경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비상장기업의 감사받은 재무제표 제출기한을 연장하고 상장기업의 연간 감사보고서 제출시점 선택권을 부여하거나 단계적 공시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감사보고서 마감시간 연장조치'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학계 관계자는 "결산월 분포를 고르게 하거나 3월말로 정해진 기업 세무신고 시한을 늦춰야 한다"며 "결산월 집중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어렵다면 우선 수입에 대해서만 적시공시하고 최종 재무제표는 일정기간을 두고 공시하는 방안의 도입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경우 주요기업의 60%가 12월 결산을 택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각각 3월과 8월을 결산월로 택하고 있다. 결산월이 어느 정도로 분포돼 있느냐에 따라 감사품질이 달라진다는 미국 내 연구결과도 있다.
"금융당국의 상장사 회계감리 25년에 한번꼴…분식회계 기업엔 세금 환급"
기업회계감사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줘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회계정보 생산의 제1차 책임자인 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시활동도 강화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은 최근 "상장회사에 대한 회계감리는 지난해 기준, 1927개 회사 중 77개만을 대상으로 실시됐다"며 "비율로는 4%만이 감리를 받은 것이어서 상장회사에 대한 회계감리 주기는 25년에 한번 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회계분식에 대한 기업 상시 모니터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채이배 의원은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기업 회계감리 주기가 3~7년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리나라는 사실상 감리 무풍지대"라고 꼬집었다. 기업에 대한 회계감리 주기를 좁혀야 회계투명성 제고가 진정 이뤄질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에 금융감독원은 "2016 회계연도에 대한 재무제표가 공시된 이후 중점감리 대상회사를 선정해 감리에 착수할 예정"이라면서 "중정감리의 비중을 30%에서 50%로 대폭 확대해 상장법인에 대한 감리주기를 단축시키겠다"고 지난 23일 밝혔다.
아울러 '회계부정을 저지른 기업을 대상으로 가시적 제재가 이뤄져야 회계투명성 제고가 비로소 담보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태옥 새누리당 의원은 회계부정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법인세를 돌려받은 대우조선해양과 같은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회계부정 발생시킨 기업을 대상으로 한 법인세 환급방지'를 골자로 한 상법 및 법인세법 개정안을 지난 7월 발의했다.
정태옥 의원이 "기업의 회계처리 투명성 제고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의한 이 법안은 이달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분식회계를 이유로 이미 낸 세금을 경정할 경우, 매년 과다 납부한 돈의 20% 범위 내에서 세액공제만 허용될 뿐 이미 낸 세금과 그 이자는 돌려받을 수 없다.
종전에는 분식회계로 인한 세금 경정시, 이후 5년간의 법인세액에서 과다 납부한 세액을 한도없이 (이익내는 것을 조건으로 걸어) 감면해줬다. 그러고도 남은 과다납부 세액은 이자까지 포함한 환급가산금으로 돌려줬다.
또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분식회계를 초래한 회사의 임원의 재취업을 퇴직 후 2년간 막는 것을 골자로 하는 외감법 개정안을 지난 9월 발의하기도 했다.
이에 윤승중 한양여대 교수는 "재취업 제한은 경제적 불이익 외에 신분상의 불이익을 부과하는 방법"이라며 "분식회계에 대한 제재수단으로 분식회계 책임자에게 경제적 불이익을 부과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비판이 크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경우 지난해부터 분식회계를 저지른 경영자가 취득한 보상을 되찾아오는 '보수환수제'를 상장기업에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보수환수제는 계약에서 정한 특정상황 혹은 불법행위가 발생할 경우 임직원에게 이미 지급된 보수를 회사가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또는 계약조항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