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순 고려대 명예교수 "자유수임제 근본적 손질 불가피"
기업과 회계법인 사이에 '甲乙관계' 형성…감사인 독립성 훼손
깐깐하게 감사했다간 다음해 일감 따내기 어려운 처지 놓여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분식회계 사건 이후 외부감사인 자유수임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행 자유수임제는 기업과 회계법인 사이에 '甲乙관계'를 형성해 감사인의 독립성을 잃게 만들고 감사품질도 떨어지게 만드는 폐해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회계업계 관계자들은 "자유수임제는 감사를 받아야 할 기업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회계법인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제도여서 감사인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근원적으로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회계투명성을 높이려 깐깐하게 감사했다간 다음에는 그 기업으로부터 일감을 따낼 수 없는 구조인 까닭이다.
오죽하면 1980년대 초 자유수임제를 도입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던 조익순 고려대 명예교수마저 최근 "현행 자유수임제는 회계사들이 기업 감사 때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며 자유수임제의 손질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조익순 교수가 지적했듯이 회계사가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잘못된 생태계로 인해 갖가지 폐해가 생겨나고 있다.
피감기업측의 '갑질'로 회계투명성 훼손
현행 자유수임제의 최대 폐해는 회계감사의 생명인 투명성이 피감기업 측의 '갑질' 때문에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외부감사인이 기업의 눈치를 살펴야 할 처지에 놓여 소신껏 감사의견을 내기 어려운게 현실이다.
이러한 가운데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이 지난 11월, 대우건설의 3분기 실적보고 에 대해 '의견거절'을 표명해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적 현실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딜로이트 안진은 "대우건설로부터 공사수익, 미청구(초과청구)공사, 확정계약자산(부채) 등 주요계정의 적정성 여부 판단을 위한 적합증거를 제시받지 못해 재무제표에 대한 검토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면서 의견거절 표명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로 인해 대우건설의 주가가 폭락하며 증시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대우조선해양의 5조원대 분식회계가 드러난 것을 계기로 회계법인들의 감사가 엄격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회계업계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이번의 '의견거절'이 매우 이례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업계는 그 이유로 안진은 자유수임제에 따라 대우건설의 감사업무를 수임한 게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대우건설이 이전 회계연도에 회계부정으로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은 탓에 안진은 금융당국 지정에 따라 대우건설의 감사를 맡았다.
이 경우 비교적 까다롭게 감사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우건설이 미온적으로 대처하다가 시범케이스에 걸려들었다는 게 업계의 추측이다.
게다가 안진은 대우조선해양의 부실감사 문제로 코너에 몰려있는 상황이어서 추가적인 리스크를 회피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실추된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성이 높은 시점이었다.
피감기업의 대표적인 갑질은 이번 대우건설 사태처럼 기업측에서 감사에 필요한 자료제출을 기피하는 것이다.
회계사가 외부감사 과정에서 기업으로부터 관련 추가자료를 제대로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설령 요청한 자료를 받게 되더라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상태거나 자료의 양이 필요 이상으로 방대해 회계법인을 골탕먹이는 수법을 쓰기도 한다.
원칙상 외부감사인은 기업측에 추가자료를 요구할 권한을 갖는다. 하지만 기업측이 마음대로 회계법인을 고를 수 있는 자유수임제 아래에서는 추가자료 제출에 소극적인 기업을 '을'의 위치에 놓인 회계법인이 압박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경우에는 고객을 잃을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이 회계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때문에 회계사는 기업이 주는 제한된 자료만으로 당해기업을 감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 계속 놓이는 것이다.
한술 더 떠 기업이 재무제표 작성을 외부감사인으로 하여금 대리로 작성케 하는 악습도 남아있다. 금융위원회가 재무제표 대리작성을 금지하는 외감법 개정안을 발표한 이후, 사례가 많이 줄었다곤 하지만 정상화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이다.
회계법인 소속 시니어회계사는 "회계감사에 필수적인 자료를 일부러 안주는 것은 물론 빼먹기도 하고 재무제표 작성을 되려 회계법인에게 맡기기도 한다"며 "젊어 보인다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하거나 화를 내기도 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어 "감사수수료를 받는 입장에서 기업고객이 무리하게 회식을 요구하더라도 피할 수 없다"며 "감사계약시 주석지원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하기도 하는데 거절하면 감사계약시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더군다나 지주회사의 계열사인 경우 수정사항을 이미 경영진에 보고했다는 것을 이유로 재무제표 수정을 안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외부감사에 비협조적인 기업에 대해 한정이나 의견거절을 내는 것도 웬만한 용기가 없으면 쉽지 않다고 실토했다. 다음 회계연도 감사용역을 재계약하는 시점과 감사의견을 내는 시점이 맞물려 있어 고객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소신대로 감사의견을 냈다간 재계약 불발로 법인이나 회계사 본인이 타격을 입을 수 있어 망설여진다"고 말했다.
기업, 외부감사 보수를 비용으로 인식…가격경쟁시켜 덤핑 유발
현행 자유수임제의 또다른 폐해는 회계법인들을 감사수수료 덤핑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회계학자들은 "기업에 외부감사인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권한을 준 가운데 기업들이 회계감사의 품질보다 가격경쟁력을 더 중시하고 있는게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계에서는 일감확보가 절실한 회계법인으로선 덤핑수주에 나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A회계법인 대표는 "기업들은 외부감사에 쓰는 돈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여겨 외부감사료부터 줄이기 시작했다"며 "울며 겨자먹기로 회계법인 간 저가수주 경쟁까지 붙어 감사보수료는 갈수록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B회계법인 대표는 "감사보수를 받으면 전체의 6할 이상을 인건비로 지출한다"고 소개하고 "수주산업과 같은 특정분야 감사시에는 공정율 등을 따져줄 전문가까지 모셔야 한다"며 회계법인의 수익구조가 나빠지고 있다고 전했다.
문제는 감사보수가 낮아질 경우 그만큼 감사업무에 투입할 자원이 줄어드는 것이다. 때문에 감사보수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부실감사가 생겨날 확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현행 외감법은 지정감사에 대해서만 감사투입시간 및 감사보수기준에 대한 제정근거를 두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는 기업과 회계법인이 '갑을관계' 아래에서 덤핑수주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감사보수는 하락세를 보여왔고 그만큼 회계감사품질은 떨어져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회계업계에 따르면 평균 시간당 감사보수는 2006년 9만7000원에서 2015년 8만원으로 9년간 17.5% 감소했다. 일각에서는 물가상승률만 고려해도 2015년 시간당 감사보수는 최소 12만1056원 정도는 찍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삼성전자의 감사보수는 2014년 기준 37억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애플사의 3분의 1 수준이다. 또 현대자동차가 최근 지불한 회계감사 보수는 미국 GM사 대비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자유수임제 도입 전에는 기업감사 한 곳만 따도 팀원 전체 인건비가 충당될 정도였는데 이제는 기업 열 곳은 감사해야 1명의 인건비를 겨우 건질 수 있는 지경"이라고 털어 놓았다.
"자유수임제, 무작정 들여온게 독이 됐다"
이처럼 자유수임제의 부작용이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자유수임제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잡고 있어 이 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딜레마이다.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은 이와 관련 "미국처럼 기업 지배구조가 고차원적으로 분화 및 전문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감사 자유수임제를 무작정 들여온 게 우리나라에 독이 됐다"고 지적했다.
최중경 회장은 "미국은 소유와 경영을 확실히 분리한 반면 우리나라는 기업오너 영향력이 강한데다 소유와 경영의 경계조차 불분명하다"며 "자유수임제 작동에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미국의 경우 주주가 경영진을 감시하기 위해 회계의 투명성 확보가 필요하고 회계법인은 이러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감사품질을 높이는 선순환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오너가 회사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어 외부감사인이 기업을 감시하는데 불편한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의 차이를 감안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