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산업 생태계 무시한 규제만능주의 활개
국회와 정책당국도 기업은 '甲' 회계법인은 '乙' 취급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이 발생한 이후 회계업계를 겨냥한 각종 행정규제와 입법안이 마치 기다렸다는 식으로 쏟아지고 있다.
정부의 대책이나 국회의 입법안 어디를 봐도 회계산업의 건전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장기적 안목의 정책을 개발한 흔적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 대신 땜질식 규제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분식회계를 저지르는 주체는 기업인데 감시를 잘못한 회계법인에 집중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 급급한 모습이다. 채찍만 난무하고 당근은 아예 없다. 게다가 회계산업의 생태계를 전혀 고려하지 못한 규제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학자들은 이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평가하고 있다.
올들어 금융당국이 분식회계를 막기 위해 내놓은 대책은 감사실패 시 회계법인 중간관리자 및 대표 제재, 회계법인 감사품질시스템 관리강화, 회계법인 임직원 주식거래 전면금지 등이 있다. 게다가 감사실패 발생시 회계법인 대표에 대한 규제 강화 및 해당 회계법인에 대한 과징금 상향부과 등을 골자로 한 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이 가운데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8월 대표발의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회계업계를 대표적으로 옥죄는 내용으로 업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박용진 의원은 "외부감사를 수행 중인 회계법인이 M&A중개를 도맡는 것은 감사업무 독립성 훼손의 위험과 비감사업무 이해상충의 위험이 수반된다"며 회계법인의 M&A 중개참여를 제한하는 법안의 취지를 밝혔다.
박 의원은 "회계법인의 감사 독립성을 제고하기 위함"이라며 발의배경을 설명했다.
M&A중개는 현재 금융투자업 인가가 필요하지 않은 업무여서 회계법인은 물론 법무법인 등도 큰 제약없이 다룰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회계법인만 제한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유럽 등에서는 회계법인의 과도한 비감사용역 수임을 부실감사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다양한 규제가 이뤄지고 있다며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외감법과 공인회계사법이 감사·비감사업무에 대한 독립성 유지의무, M&A·세무컨설팅 등 비감사업무에 대한 이해상충 가이드라인을 이미 충분히 규정하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관련법안을 또 내놓는 것은 업계를 압박하기 위한 지나친 규제행위"라고 반발했다.
그는 회계법인을 M&A시장에서 배제한다면 M&A시장의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계법인의 M&A중개 참여제한이 합리적 대안없이 무작정 진행되면 M&A 대상기업 실사절차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마다 자본시장의 발달과정과 규제환경이 다른데 우리나라의 경우 회계법인이 M&A거래를 그간 주도해왔기 때문이다
실사절차는 M&A 대상회사의 재무·회계적 위험을 회계법인이 사전에 걸러내 거래신뢰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에 문제가 생기면 M&A 대상회사에 대한 거래신뢰도가 떨어져 국내 M&A시장이 위축돼 산업 구조조정이 지연되거나 벤쳐기업의 창업의욕을 꺾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감사실패 발생한 회계법인의 대표 제재, 업계 혼란에 빠뜨릴 것"
회계업계의 생태계를 무시한 규제안을 내놓기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금융당국은 작년 한해 조선·건설업 등 수주업에서의 '회계절벽' 현상이 잦아지자 회계법인 대표를 제재하는 내용의 규제안을 제시했다. 회계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분식회계에 직·간접적으로 책임있는 회계법인의 대표에 대해서도 직무정지·해임권고 등 엄중제재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회계업계는 이러한 규제가 이뤄질 경우 회계법인을 상대로 한 소송남발, 회계법인 대표취임 기피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 원안은 과잉규제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지난 3월 규제개혁위원회로부터 철회권고를 받았다. 이후 수정을 거쳐 지난 6월 규개위 재심사를 통과했다.
결국 금융당국이 규제의 칼을 하나 더 마련하게 됐다.
금융당국은 한술 더 떠 부실감사가 발생한 회계법인의 대표에게 책임을 물어 공인회계사 자격을 박탈할 수 있도록 하는 외감법 개정안을 국회에 올리겠다고 밝혔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감사실패를 예방하겠다는 금융당국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회계업계의 실정을 무시한 행정편의적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부분의 회계법인들이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고 있다"며 "각 파트너들이 내놓은 보고서에 대해 대표가 모두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을 무시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회계법인 대표 제재사실이 각종 소송에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일고 있다. 일부 중소·중견회계법인의 경우 소송에 휘말릴 경우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릴 수 있다며 걱정하고 있다.
A 회계법인 대표는 "회계법인 대표가 징계받은 사실은 소송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해 패소율이 높아질 것"이라며 "패소로 인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법인은 존폐의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형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회계법인 대표에 대한 징계사실이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져, 재판부 입장에선 당해 회계법인이 고의로 감사기업의 분식회계 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 경우 고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회계법인 스스로 입증해야 할 것"이라며 "이는 대표가 제재받은 회계법인이 패소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부연했다.
회계법인의 대표가 금융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경우 34% 수준인 회계법인의 소송패소율은 지금보다 더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B 회계법인 대표는 "대표에 대한 징계가 이뤄질 경우 회계법인 대표직을 서로 기피할 것"이라며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면 실력이나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을 대표자리에 꼭두각시로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다. 이 경우 회계감사 품질관리가 더 어려워져 부실감사를 부채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문성 한양여대 교수는 "감사실패의 1차적 책임은 회계정보 1차생산자인 기업에 있다"며 "기업보다 회계법인을 옥죄는 방법으로 분식회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