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회계법인 "한 순간 문 닫을 수 있다" 위기감
회계법인 배상판결 늘어나자 보험사 책임보험판매 기피
분식회계 관련 소송과 손해배상액이 급증하면서 회계법인들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회계부정 규모가 커진데다 회계법인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이 급증해 한 순간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해배상공동기금 손해배상책임보험 손해배상준비금 등 소송에 대비한 준비는 늘어만가는 소송과 손해배상액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 대형법인들과 상당수 중견법인들은 책임보험에 기대보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중소중견법인들은 보험사에서 기피하고 있어 '비빌 언덕'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처럼 회계감사의 리스크는 갈수록 커지고 있는 반면 리스크를 회피할 수단은 제한적이어서 회계업계의 생존환경은 척박해져만 가고 있다.
게다가 대우조선해양 사건을 계기로 검찰이 회계법인과 기업간 분식회계 비리 유착관계를 밝혀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검찰의 이같은 행보는 향후 회계법인들을 상대로 한 소송이 더욱 늘어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3년새 회계법인 손해배상금액 12배 급증
지난 3년간 회계법인들을 상대로 한 분식회계 관련 소송건수는 287%, 배상금액은 약 12배(1133%) 증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감원에 따르면 2015 회계연도 기준 회계법인 소송종결건수(피소종결건)는 31건으로 2013 회계연도 8건보다 23건(287%) 늘어났다. 3년간 소송건수는 2013 회계연도 8건, 2014 회계연도 12건, 2015 회계연도 31건으로 급증세를 보였다.
감사업무 부실 등을 이유로 회계법인 측에서 배상한 금액도 2015 회계연도 기준 37억원으로 2013 회계연도 3억원보다 34억원(1133%) 많아졌다. 3년간 총 손해배상책임액은 2013 회계연도 3억1000만원, 2014 회계연도 14억1000만원, 2015 회계연도 37억원으로 도합 54억2000만원에 이른다.
특히 올 3월말 현재 회계법인이 피소돼 소송이 진행 중인 사건은 84건으로 대상 회계법인 16개, 소송가액 총 1924억7000만원 규모이다.
박윤종 안세회계법인 대표는 이같은 흐름에 대해 "굉장히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회계사들에게 종이창(감시권)과 종이방패(수임계약권)를 쥐어준 채 책임(소송)만 돌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윤종 대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외부감사인의 자료요청에 잘 응하려 들지 않는다"며 "기업들이 응한다해도 영업비밀 누출방지 등을 핑계로 제한적 범위의 자료만을 추가제공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소송은 급증하는데…손해배상 준비재원은 작년 9% 증가에 그쳐
소송건수와 손해배상액은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손해배상을 위한 준비재원은 쥐꼬리만큼 늘어나는데 그치고 있다. 2015 회계연도의 전체 회계법인 손해배상책임 준비재원은 1조3000억원 수준으로 전기보다 9.2%(1113억원) 가량 늘어나는데 그쳤다.
회계법인들은 감사업무 등으로 인한 고객 및 제3자의 손해를 배상하기 위해 손해배상공동기금, 손해배상책임보험, 손해배상준비금 등의 재원을 준비하고 있다. 책임보험의 경우 각 회계법인이 책임능력에 따라 선택해 적립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한국공인회계사회에 적립돼 있는 손해배상공동기금은 449억원(3월말 기준), 개별 회계법인이 유보금으로 마련해둔 손해배상준비금은 2162억원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회계법인들의 손해배상 준비재원은 대부분 보험회사에 가입한 손해배상책임보험으로 충당하고 있다. 31개 회계법인이 가입한 책임보험은 1조659억원으로 전기 대비 9.8% 증가한데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한 회계법인의 대표는 "회계법인 대상의 분식회계 관련 소송건수와 그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액이 커질수록 업계는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일부 중소·중견회계법인의 경우 난무하는 소송과 그 무게에 짓눌려 자칫 존폐의 위기에까지 내몰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실제 대형회계법인들을 포함한 총 160여개의 회계법인 중 31군데만이 손해배상책임보험에 가입돼 있어 업계는 손해배상 위험에 취약한 상태이다.
그는 "감사실패 위험을 보장해주는 상품을 취급하는 보험사가 거의 없을뿐더러 상품이 있다한들, 그 수가 너무 적어 비교하기 어렵고 보험료는 고액이다"며 "법인규모가 작을수록 특히 가입심사가 까다롭고 상품가입에 애를 먹는다"고 말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국내에서 영업을 영위 중인 총 17개의 손해보험사 중 2곳만이 감사실패 위험 보험상품을 취급 중이다. 그런데 해당상품은 그 보험사 소속 직원들조차도 그것이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보험사의 한 관계자는 "전문인 배상책임으로 분류가 되는 이 상품은 국내에서 취급하는 보험사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며 "최근 분식회계와 관련해 배상 확정판결이 늘어난데다 감사실패로 인한 손해액을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험사들도 이 상품 취급을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라고 부연했다.
이런 탓에 일정 규모 이하의 법인들 중에는 회계법인임에도, 감사리스크를 애초부터 줄이기 위해 감사업무 수임을 기피하고 세무대리 등 비교적 간단한 비감사업무에만 집중하는 사례도 있다.
중소중견회계법인이 감사인으로서 당당히 자리잡을 수 있는 생태계가 무너져가고 있는 셈이다.
검찰, 사상 첫 회계법인의 분식회계 묵인혐의 수사
설상가상으로 검찰은 2010~2015년 사이에 대우조선해양의 회계분식 행위를 묵인해줬다는 혐의를 잡고 안진회계법인을 수사하고 나섰다.
검찰은 안진 소속 회계사 십여명을 대상으로 대우조선 분식회계 스캔들 책임소재 파악을 위한 소환조사를 벌인 끝에 회계사를 구속했다. 지난 5일에는 파트너에 해당하는 상무를 소환했으며 8일에는 수뇌부에 해당하는 부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검찰이 이처럼 분식회계와 기업비리를 연계해 외부감사인(회계법인)과의 유착의혹 규명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 측도 "대형회계법인에서 상장사의 회계사기를 묵인한 혐의와 관련된 조사는 난이도가 높아 수사한 전례가 거의 없을 정도"라면서도 회계법인과 기업 간의 유착관계를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는 "최근들어 분식회계 근절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따라 소송건수가 늘어남은 물론 배상판결도 많이 나오는 편"이라며 회계법인들의 리스크가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분식회계 관련 소송 피소와 이에 따르는 손해배상책임에 대한 부담감은 앞으로 계속 커져만 갈 것으로 보인다"며 분식회계에 휘말린 회계법인이 문을 닫는 사례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